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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Dec 26. 2023

라면 연대기

2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라 군이 함께 살고 있던 산동네 판자촌이 ‘철거대상’으로 들어간 것은 나름 귀하던 라면이 헐값의 간편식으로 전락하던 시기와 비슷했다.

라 군이 살고 있었던 동네는 세상에서 ‘판자촌’이라 불리던 동네였다.


물론,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라 군에게는 그냥 ‘집’이고 ‘우리 동네’였을 뿐이다.

당시 사대문 – 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북대문의 외곽은 ‘변두리’라는 조금 무책임하고 얼버무리는 듯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집이 있는 곳은 동대문에서도 버스로 이십여 정류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버스가 정차하는 ‘종점’이었으니 당연히 변두리라는 단어로 불렸는데,

그의 집은 그 종점에서도 삼십여 분을 걸어 올라가는 곳에 있었으므로 변두리 중의 변두리라고 할 만했다.     

내용만 놓고 살펴보자면 뭔가 ‘라’ 군의 성장 과정이 매우 가난하고 불행하며 고단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나고 자란 라 군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종점’ 근처에 집이 있다는 것은 버스를 타고 어딘가를 가게 될 때,

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무척이나 큰 혜택 같은 것이다.

게다가 높은 곳에 살다 보니 늘 집안에 햇살이 가득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장점이 있었다.

요새 말하는 이른바 ‘한강 뷰’를 일찌감치 자라면서 늘 봐왔으니 라 군에게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집이었다는 의미다.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걷다 보면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 나타났다.

그 비탈은 여름에는 짙은 회색의 흙길이었는데, 

겨울에는 베이지색으로 뒤덮이곤 했었다.

눈이 쌓이거나 산 위의 집들에서 내다 버리는 하수가 얼어붙어 비탈은 겨우내 꽁꽁 언 빙판이었는데,

미끄러지지 않으려 저마다 집 앞에 연탄재를 부숴 깔아 두니 온통 골목이 베이지색으로 그득했다.


단점이 있다면,

한겨울을 지내고 나면 얼음과 연탄재가 버무려진 단단한 골목 바닥이 거의 어른 손 두어 뼘 가까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다.

날이 풀리면 골목은 늘 녹은 빙판과 버무려진 연탄재로 인해 질퍽대거나.

그런 시기가 지나면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연탄재로 희부옇게 먼지가 일었다.

아이들은 깔깔대며 일부러 더 먼지를 피우려고 골목을 가로세로 뛰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자리에 드러눕는 바람에,

라 군은 늘 집에 들어갈 때 침울해했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철없는 나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집에 드러누워 계시니 어머니가 늘 집에 없었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영세민에게 주어지는 ‘공공근로’라는 일을 하러 산동네에서 내려가곤 했다.

어머니에게 주어진 일거리는 대개.

산동네 아래에 펼쳐진 이른바 ‘시장 동네’에 늘 쌓이는 흙과 쓰레기들을 거둬 비닐로 짠 포대에 모으는 일이었다.

산동네에 겨우내 쌓인 이른바 ‘연탄재 포장도로’는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쉼 없이 아랫동네로 흘러내려가고,

그렇게 쌓인 흙과 연탄재들은 가까스로 아스팔트 포장을 해 놓은 시장 동네의 도로들을 덮곤 했다.

그것을 산동네에 사는 영세민들이 내려와 다시 쓸고 모아서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순환계이기는 해도,

한편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생태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병원에 가기도 어려운 주민들은 겨울철 미끄러져 다리 부러지기 딱 좋은 산비탈 골목들에 연탄재를 버리고,

만약 그곳에 버리지 않는다면 주민들이 겨우내 쌓이는 연탄재를 처리할 마땅한 방법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쌓인 연탄재는 날이 풀려가면 빗물과 하수돗물에 씻겨 아랫동네로 흘러내려가고,

흘러내려 가 쌓인 연탄재와 흙더미는 다시 윗동네 주민들이 포대에 넣어 치우고,

그 포대는 걸핏하면 범람하는 한강 변에 임시 둑을 만드는 데 쓰였으니 매우 바람직한 자원의 선순환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으로 라 군의 어머니와 같이 어려운 가정에는 크진 않아도 일정한 노임이 나오니,

사회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순환계라 할 수 있었다.     


어느 이른 여름날,

땡볕 아래로 산동네를 오른다는 것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라 군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아직 하복을 사 입지 못한 라 군은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 시커먼 교복 속에 들어가서 

– 왜 ‘들어갔다’라는 표현을 쓰는지는 당시 교복을 사주던 기준 때문이다. 

당시에는 성장기 아이가 클 것을 대비해서 소매도 길고 한참 큰 교복을 입혔다. - 

옷 속에서 훅훅 올라오는 쉰내 같은 땀 냄새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거추장스럽게 커다란 교복은 입학식 날의 추위도 막아주지 못했지만, 더위에도 무척 약했다.

어정쩡한 천의 두께는 가뜩이나 헐렁한 품속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단추가 풀려있는 목덜미 쪽으로 더운 공기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런 짜증과 더위 속에서 힘겹게 산비탈 골목을 올라 집으로 오른 라 군의 눈에 낡은 툇마루 위에 어머니가 넋을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거의 넋이 나가 있는 것 같던 얼굴을 들어 ‘라’군을 바라보았고,

이내 통곡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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