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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Dec 27. 2023

라면 연대기

3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3.     


라 군은 어중간히 두꺼운 교복의 등판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틈이 없었다.

어머니는 열넷이라는 나이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삼팔선을 넘었을 만큼,

강인하고 생명력이 끈질긴 사람이었다.

라 군이 자라면서 보아온 어머니라는 존재는 여성도 남성도 아니었다.   


화장 한번 해본 일이 없이 ‘먹고사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띠고 태어난 것처럼,

라 군이 눈을 뜨기 전에 일어나 밥을 짓고,

손바닥만 한 마당을 청소하고, 마당 한구석에서 키우는 닭들의 모이를 주고 닭장을 청소하고,

담장이라기도 뭣한 시멘트 블록들의 아래에 촘촘하게 심어진 화초들에 물을 주는,

그런 어머니였으니까.

한때 어머니의 바지런한 행보를 살펴보던 라 군은 어린 마음에도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산동네 판자촌에는 공동수도가 있었고 그 수도가 설치된 집에 가서 동전을 내고 물을 길어 쓰는 게 보편적이었다.

그 집 외에 집안에 수도꼭지가 설치된 집은 단 한 군데뿐이었는데,

그 집은 유일하게 판자촌 내에서 기와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그렇게 애써 힘들게 길어온 물을 굳이 먹지도 못할 화초에 부어주는 어머니는 뭔가 이 바람직한 순환계에서 살짝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인함을 잘 아는 라 군은 의문을 어머니께 묻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라 군은 혹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라고 생각했지만, 한낮인데도 어둑한 방 안에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방문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곤 일단 안심했다.

말없이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는 라 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라 군은 아마도 어머니가 통곡한 이유를 말해주려 하는가 싶어 주춤거리며 다가갔는데,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내용이라 라 군은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  너, 얼마 전에 나온 사발면인가 뭔가 먹고 싶다고 했었지. 이 돈 가지고 가게 가서 사 와.

- 어?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광고했던 사발면이라는 것이 있었다.

간편하게 끓는 물만 넣으면 3분 만에 어쩌고 저쩌고…….

라 군에겐 미지의 라면이었는데, 라 군은 그것을 꼭 먹어보고 싶었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늘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가득하기도 하고 그게 더구나 ‘라면’이라면 엄청난 관심을 두던 라 군에겐 선망의 음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쉽게 사 먹을 수 없었던 것은,

사발면의 가격이 봉지라면보다도 비쌌기 때문이었다.

처음 엄마에게 그 라면을 사달라고 졸랐다가 호되게 야단맞은 이래로 라 군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먼저 사발면을 사 오라고 하자,

라 군은 신이 나서 돈을 받아 들고 구멍가게로 뛰어갔다.

돈을 치르고 사발면의 실체를 받아 든 라 군은 좀 실망했다.

비싼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고 가벼운 사발면의 무게 때문이었다.

하얀 스티로폼으로 사발처럼 만들어진 그릇이 신기하긴 했지만,

애써 사든 사발면이 그렇게 작을 줄 몰랐기에 라 군은 좀 시무룩해졌다.

라면을 사 들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골목길을 돌아 집으로 향하면서,

라 군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구멍가게’에서는 ‘구멍’을 파는 것도 아닌데 왜 구멍가게라고 부르지? 하는.

라 군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다 말고 갑자기 사발면을 사 오라고 하던 어머니 못지않게,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사발면을 사 들고 오면서 엉뚱하게 가게 이름을 궁리하는 라 군이었다.     

한글도 띄엄띄엄 읽는 어머니에게 사발면의 조리법은 난관이었다.

어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발면 뚜껑에 쓰여있는 글자들을 난감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한창 바라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이리 가져오라, 하시더니 라 군에게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사발면 안에 붓고 3분 정도 기다렸다가 먹으라고 말할 때까지 라 군은 속으로 안달이 났다.

이른 더위에 산비탈을 오르다 흘렸던 땀은 산동네에 부는 바람으로 일찌감치 사라졌고,

끓는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사발면의 뚜껑 사이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라 군을 자극해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라,

3분이 흐른 후 라 군은 툇마루에서 사발면을 들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살폈다.

혹시 좀 드시겠어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안 그래도 작은 사발면 그릇이 불안해서,

그저 말없이 눈치를 보는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니는 아직도 젖어있는 눈으로 

‘너 그냥 다 먹어라’ 했다.     

빳빳한 뚜껑을 떼어내자 고소한 냄새와 함께 뭔가 노랗고 하얗고 초록색인 건더기들이 뜨거운 물에 불어 통통해진 것이 보였다.

그건 기존의 봉지라면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심스레 건더기를 건져 씹으니, 말캉한 알맹이가 품고 있던 짭조름한 국물맛이 혀끝을 맴돈다.

라 군은 면발을 젓가락으로 건졌는데, 그건 지금까지 보통의 라면에서는 볼 수 없던 아주 가느다란 면발이었다.

한 입을 넣고 씹어보니 뭔가 기존의 봉지라면보다 더 강하게 기름 맛이 나는 면발이 쫄깃했다.

봉지라면보다 맛도 강하고 양도 적은 컵라면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는데,

라 군은 국물을 훌훌 들이마시곤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으로 상위에 사발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내려놓은 스티로폼 사발을 가져가더니 그릇 바닥에 남은 국물을 훌쩍 마셨다.  

                                             

- 뭐 짜기만 하지 별거 없네. 이제 되었냐? 이 그릇은 병아리 모이 그릇으로 쓰면 되려나.  

아 참, 이제 우리 닭 못 키우겠지.     


느닷없는 어머니의 말에 라 군이 어안이 벙벙해하는데 어머니의 다음 말이 라 군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 우리 집, 철거당한단다. 동사무소에서 통지가 왔어. 다 다음 달까지 이사 가라고. 

그린벨트 인가 뭔가 우리 집이 걸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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