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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Dec 29. 2023

라면 연대기

4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4.     


라 군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단어들의 무차별 공격에 잠시 머릿속이 텅 비었고,

조금 전까지 입술 끝을 맴돌던 짭조름한 사발면의 맛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철거, 이사, 그린벨트 ’ 


이 생소한 단어들의 조합은 아직 중학교 1학년인 라 군에게는 처음 접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이 참 묘한 게 처음 듣다시피 하는 단어들 임에도 그 단어들이 주는 어감은 몹시도 위협적이고 권위적이며 초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 엄마. 그게 뭐야? 우리 이사 가는 거야?     


라 군으로서는 세 단어 중에 의미를 알고 있는 한 가지, 

‘이사’를 물어보는 것이 일편 타당한 판단이자 질문이었는데,

라 군의 질문에 방 안쪽에서 깊은 한숨인지 신음인지와 비슷한 소리가 들려 라 군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햇살이 밝은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방 안의 아버지 모습은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한쪽 다리에 깁스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앉은 아버지를 좀 더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 쉽게 말해서, 나라 놈들이 이 동네를 다 밀어버리고 나무를 심겠다는 거다. 

우리는 쥐꼬리만 한 보상금을 받고 다른 데로 가라는 이야기고.     


어머니보다 몇 년 먼저 이북에서 넘어온 아버지는 늘 무뚝뚝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말이 짧은 대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쉽게 말해서’라고 시작하여 정말 단순 명료하게 문장을 압축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하지만 어린 라 군은 아버지의 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우리 집을 왜요? 이 집, 아버지가 샀다고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사는 동네에 왜 나무를 심어요? 우리는 그럼 어디로 이사를 가요?  

   

아버지는 힐끗 라 군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자리에 누워버렸다.

풀썩, 하고 낡은 이부자리가 들썩이자 약간의 지린내와 썩어가는 생선 냄새 비슷한 것이 섞인 공기가 방 밖으로 밀려 나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라 군의 대화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그저 툇마루에서 턱이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굽은 채로 낮은 블록담 너머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라 군은 천천히 일어나 담장으로 갔다.

아버지가 퇴근 때마다 등짐으로 지고 산비탈을 올라와 쌓은 담은 어릴 적엔 꽤 높은 줄 알았는데 이제 라 군의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라 군의 집은 산동네에서도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라 군의 뒷집을 제외하곤 두 번째로 높은 집이었다.

멀리 한강이 보이고, 담 아래로 계단처럼 층층으로 내려앉은 지붕들이 보였다.

‘판자촌’이라 불리는 동네이긴 했지만 실제로 판자로 지은 집들은 없었다.


진짜 판자로 지은 집들은 라 군의 집에서 백여 미터를 더 지나서 있는 산봉우리의 막바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었다.

그곳에 반 친구 한 명이 살아서 가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는 정말 판자로 만들어진 집안에 구들도 없는 집들이라 라 군은 기겁하고 돌아왔었다.     

하지만 라 군의 집 아래로 있는 집들은 모두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들이었다.

비록 기와지붕은 아니고, 슬레이트나 얼기설기 엮은 목제 지붕에 아스팔트 펠트를 붙인 집들이긴 했지만.

라 군은 원래 집들이란 다 그렇게 무채색인 걸로 알고 자랐다.

집 벽은 시멘트 블록으로 회색에 가까운 색상들이었고, 지붕은 아스팔트 펠트로 까맣게 덮인 것이 기본이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아랫동네를 바라보니 그 동네의 집들은 전부 빨간 기와지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경계는 지나칠 정도로 뚜렷해서,

먼 훗날 라 군이 기억을 더듬을 때면 마치 인디 영화의 어떤 신처럼 윗동네는 흑백으로 아랫동네는 컬러로 선명하게 대비되어 떠오르곤 했다.

라 군이 아버지의 말을 명확히 다 이해를 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흑백으로 보이는 동네들은 나라에서 전부 없애려고 한다는 것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데 아스팔트 펠트로 뒤덮인 검은색 지붕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스팔트 펠트라는 게,

가장 저렴한 지붕 마감재의 일종이라는 것은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라 군도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끈적한 아스팔트 펠트가 두루마리로 보관될 때 서로 달라붙지 않게 하려고 잔 돌가루가 얇게 입혀져 있어서 햇볕을 받으면 마치 금가루라도 뿌려진 것처럼 반짝이곤 하는 거였다.

비닐보다 비싸지만, 무게가 있어서 날리지도 않고,

고정하는 못이 박혀도 아스팔트라는 특성상 끈적하게 감싸줘서 방수도 되는 지붕,

그 위에 기와를 깔면 완벽하게 기와지붕으로 완성이 되는 거였다.

이를테면 라 군이 바라보고 있는 아랫집들은 아직 기와를 얹지 못한 ‘미완성의 집들’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그 지붕에 시멘트 기와가 얹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로 생각하면서 다들 기다리며 살아왔건만,

이제는 그 기회는 다 없어지고 숲으로 바뀔 거라는 것.


미완의 집들은 ‘집’이 아니라는 것.

그게 라 군이 이해한 아버지의 말이었다.     

어디선가 경쾌한 리듬의 새마을 운동 노래가 들여왔다.

다 저녁에 새벽종이 울렸다고 시작하는 노래를 틀어놓는 방송국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아름다운 새마을을 우리 힘으로 만들자고 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 어쩐지 자신과 이 동네 사람들은 포함이 안 되어있다는 생각에,

라 군의 입안에 아직 맴도는 사발면의 맛이 어쩐지 몹시도 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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