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능선오름 Jan 10. 2024

라면 연대기

5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5.


그날 이후로 라 군은 그토록 좋아하던 라면을 양껏 먹을 수 있었다.

라 군의 집이 빈한한 편이긴 해도, 늘 안방구석에는 두 박스 이상의 라면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동분서주로 인해 영세민이 매월 나라로부터 지급되는 라면 한 상자를 모은 것이었다.

그 귀한 라면을 어머니는 라 군이 쉽게 먹을 수 있도록 내놓지 않고,

이따금 구멍가게나 다른 이웃집에 몇 개 들고 가 물물교환을 하곤 했다.

라 군이 군침을 삼키는 라면 봉지들은 때로 쌀 몇 줌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이른 봄, 작년 겨울에 쟁여놓았던 연탄들이 다 없어졌을 때 연탄과 교환이 되기도 했었다.

라 군은 마음대로 라면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내심 좋았지만,

악착같던 어머니가 그렇게 쉽게 라면을 내어주는 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 어차피, 우리가 이사하려면 짐을 줄여야 해. 덩치 큰 짐들은 다 없애야 해.

그래도 여름이 올 거라 연탄 짐이 없는 게 어디니. 다 땔 수도 없고 말이야.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박스에서 라면을 꺼내 끓이곤 했다.

아버지는 더 말수가 줄어들고 깊은 한숨을 쉬는 밤이 잦아졌다.

산동네 토박이들 말고는 드나드는 외지인이라곤 없던 동네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라 군이 얼핏 보기에도 뭔가 동네 사람들과는 다른 차림새의 중년 남녀들을 거의 매일,

동네에 출몰해서 이웃집 사람들과 골목 귀퉁이에서 수군거리고,

뭔가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라 군의 눈에 툇마루에서 어머니가 돈을 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가 다치기 전, 아버지의 월급날 외에는 어머니 손에 돈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라 군은 생소한 돈다발에 눈이 크게 떠졌다.

라 군이 다녀왔노라, 인사를 드려도 어머니는 꼼짝하지 않고 손에 단단히 움켜쥔 돈다발을 세고 또 셌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떨구는 것이다.     


- 아무리 헤아려도 더는 안되네. 이걸로 어떡해야 하지.     


어머니의 한숨에 추임새라도 넣듯 어둑한 방안에서는 아버지의 긴 한숨이 들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라 군은 부모님의 울적한 심사가 마치 가슴에 얹힌 보리밥 덩이처럼 거북해서,

어머니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엄마, 왜 그래? 근데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난 거야?


어머니는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자신도 이 상황들에 이해가 가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멈칫거리다 고개를 돌려 어둑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오라 하는 말을 듣고 라 군은 주춤거리며 툇마루에 올라섰다.

여름에 접어드는 날씨에 이십여 정거장이 넘는 거리를 걸어온 라 군이 신발을 벗자 독한 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오랜 투병으로 이미 악취가 가득한 방안에 들어서자 모든 냄새가 희석되어 버린다.

아버지는 퀭하게 들어간 눈을 들어 라 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 군과 아버지가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바라본 일은 오랜만이라,

라 군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공연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라 군의 눈에 방구석을 달음박질하는 거미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천성이 부지런한 어머니 덕에 비록 볼품없는 시멘트 블록집이었어도 집안에 먼지 한 톨이 없었는데 요즘은 여기저기 거미줄이 생기고 벌레들이 오가는 게 보였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는데,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음성은 마치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동굴의 울림처럼 라 군의 귀를 울렸다.    

 

-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알 건 알아야지. 나는 네 나이 때 일본에 소년병으로 끌려가서 군대훈련을 받았다.    

 

또, 아버지는 케케묵은 전설 같은 과거지사를 끌어내어 라 군의 심기는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투덜댈 수는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안 그러면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질 것이고, 잔소리가 더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집을 철거한다는 말은 들었지? 그래서 나라에서 집마다 아파트라는 걸 준단다.

- 아파트요? 그게 뭐예요?

- 나도 잘 몰라. 뭐 사, 오 층 정도 되는 건물인데 거기에 여러 집이 들어가서 산다더구나.

그런데 그 아파트 입주권은 있어도 돈을 내야 입주가 된다고 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동네 사는 사람 대부분은 그럴 돈이 없지. 당장 오늘내일 먹고살기도 바쁜 판에.

아마 저 기와집 사람들 말고는 그 입주권으로 아파트에 이사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너도 요즘 외지에서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거 봤지?     


라 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사람들이 입주권을 산다는 거야. 입주권을 팔면 그 사람들이 돈을 쳐주는데, 

그 정도면 전세는 어려워도 월세 보증금은 된다는구나. 그래서 네 엄마가 입주권을 팔아 돈을 받은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라 군은 희미하게 돈에 대해 의문이 풀리긴 했지만, 아파트라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의문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라,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아버지에게 했다.     


- 그런데 아버지. 그 아파트라는 게 어디에 있는데요?     


라 군이 질문하자 아버지의 퀭한 두 눈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오고 갔다.     


- 글쎄, 나도 본 적이 없지만, 지금은 없는데 앞으로 지을 거라더라. 

한 일, 이년 걸린다는 거 같은데. 저 한강 너머에 말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친 라 군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야트막한 담장에 가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흑백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동네 아래로 빨간 지붕의 동네들이 야트막하게 깔린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무심하게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그 한강 너머로 푸르게 펼쳐진 풀밭 같은 것들이 아랫동네 지평선의 끝이었다.

늘 장마철이면 물이 넘치고 집 지붕이 떠내려가기도 하고 소나 돼지가 떠내려가기도 하던.

듣기에 강 건너 짙푸른 풀밭 같은 것은 배추밭이라고 들었었다.     

라 군은 시장해진 배를 문지르며 오늘 저녁은 라면에 아삭한 배추김치를 먹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멍청하게 한강을 내려다보는 라 군의 귓가에 어머니가 개와 닭에게 사료를 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 너 내일 학교에 가면 담임선생님한테 며칠간 어머니 일 때문에 학교 못 온다고 말해.

나하고 집 좀 알아보러 다니자.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연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