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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1. 2024

라면 연대기

6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6.     


학교에서 담임선생에게 며칠간 못 나올 수 있다고 하며 아버지가 적어주신 확인서란 것을 들고 간 라 군은,

말없이 알았다, 고 만 말하는 담임을 뒤로하고 교무실을 나오며 좀 서운했다.

나름대로 결석도 없고 지각도 없이 모범생으로 꼽혀 상도 받던 라 군이 결석한다는데,

담임선생은 이유도 묻지 않았고 별 관심도 없어 보였다.

하긴, 이라고 라 군은 생각했다.

어차피 한 반에 칠십 명도 넘는 아이들의 이름도 다 외지 못하는 담임이었다.

담임선생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생님들에게 라 군과 같은 아이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인식되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들의 이름을 부르려면 일단 교복 가슴에 달린 명찰부터 들여다봐야 했으니까.     


다음 날 아침 일찍 어머니는 라면 두 개를 끓여 아버지와 라 군에게 한 그릇씩 넘기곤,

부자가 말없이 라면을 먹는 동안 마당에서 닭장의 닭에게 모이를,

컹컹대는 개에게는 저녁에 먹고 남은 밥과 고등어 대가리를 끓여 밥을 챙기곤 생선을 씻어낸 물을 화분에 일일이 나눠주었다.

라면을 밥보다 좋아하는 라 군이지만 아침부터 라면을 먹는다는 건 뭔가 좀 거북했는데,

그렇다고 왜 라면이냐고 어머니께 물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아 조용히 아침 식사는 끝났다.

좀 늦을 거 같다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자,

아버지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미 날짜도 오래 지난,

어머니가 근로활동을 하며 모아 온 신문지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종점에 내려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라 군은 어디로 가자는 건지 어머니께 따로 묻지 않았다.

종점이라 자리에 앉기가 다소 수월한데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버스는 일하러 나가고 통학을 하는 사람들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했다.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내리는 사람은 없는데 타는 사람만 점점 늘어서,

버스 차장은 양팔로 버스 출입문 손잡이를 꽉 붙들곤 암팡지게 온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 넣곤 했다.

오라이! 반복되는 버스 차장의 기합을 들으며,

라 군은 문득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지 않는 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시내버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는 사람은 계속 늘어나는데 내리는 사람은 버스 노선의 중간이 지나야 겨우겨우 생겨나는.

라 군이 사는 산동네도 그곳에서 어딘가로 가는 사람은 없고,

늘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이 늘어나고 판잣집도 덩달아 늘어나는 거였다.

좀 더 어릴 적에는 그래도 라 군의 집 마당에서 바라보면 좀 더 높은 산등성이의 커다란 바위들이 보이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곳까지도 빽빽하게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마치 바닷가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따개비처럼 빼곡하게 바뀐 것이다.     

버스 뒷자리에 운 좋게 앉기는 했지만 빼곡한 차 안에서 모를 사람들의 책가방 혹은 엉덩이에 짓눌려 가는 동안 라 군의 머리를 스치던 생각들은,

내리자고 재촉하는 어머니의 말에 소스라치듯 사라졌다.

그래도 노선이 어느 정도 지나자 조금 여유가 생긴 버스 통로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내리려고 하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차장이 말을 걸었다.     


- 야, 너. 여기 너 내리는 데 아니잖아. 아까 사람이 많아서 못 내렸니?     


라 군은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다가 아, 하고 생각이 났다.

특별히 외출복이라곤 없던 라 군은 평소처럼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나왔는데,

그 교복의 배지를 보고 라 군이 잘못 내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얼결에 뭔가 대답을 우물쭈물하던 라 군의 손목을 잡고 휙 잡아채듯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렸다.

- 내가 쟤 엄마예요     

어머니는 화난 사람처럼 쏘아붙였고, 버스 차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그냥 투덜거리는데 버스는 매캐한 연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라 군은 잠시 당황스러웠다.

어머니가 남에게 그렇게 화를 내듯 말을 하는 것도 처음 보았고,

순간적으로 빨리 대답을 못 하고 어물거린 자신도 창피했으니까.

라 군의 손목을 놓은 어머니는 말없이 잰걸음으로 낯선 동네를 향해 걸었다.

바삐 걷는 어머니가 아직도 지난겨울의 털신을 신고 있는 것이 보였다.

털신은 사실 지난 겨울 것이 아닌 몇 년 된 것이라 거의 뒤축이 닳고 벌어져 있는 낡은 것이었다.

털도 거의 다 빠져버린 검은색 고무로 만들어진 털신은 그냥 검정 고무신처럼 보였는데,

아침을 라면으로 때우고 나와서 그런지 벌써 헛헛한 게 라 군의 어깨가 축 처졌다. 

    

- 그럼 어디쯤 그 집이 있는데요?

- 그 정도 보증금으론 그 집 말곤 가볼 데가 없어요. 그냥 제 말을 들으시라니까.

거기가 최고이니 일단 계약을 하고…….     


‘복덕방’이라고 구불거리는 페인트 붓질로 써진 간판이 아니었다면 거의 움막 수준으로 보이는 점방 앞에서 어머니와 머리가 거의 벗어진 중늙은이가 다투듯 하는 걸 라 군은 바라보고 있었다.

산비탈 같은 길을 걸어 여기저기 묻고서야 복덕방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복덕방 주인이라는 사람은 어머니가 말한 ‘보증금’을 듣자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혼잣말로 투덜대는 게 보였다.

돈의 가치를 아직 정확히 모르는 라 군의 처지에서도,

뭔가 어머니가 제시한 ‘보증금’이라는 것이 꽤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으니.     


- 아, 그래도 안 가보고 어떻게 계약을 해요. 일단 가보자고요.     


어머니의 항의에 복덕방 주인이라는 중늙은이는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 거기가 어딘데요. 이 아줌마 참. 내가 소개비 얼마나 받자고 그 꼭대기를 또 가라고요.

아, 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으니, 가서 보고 오쇼. 맘대로 해요.     


복덕방 주인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는지,

길을 자세하게 물어보곤 라 군의 손목을 호되게 잡아끌었다.

라 군은 어쩐지 아침에 먹었던 라면이 다시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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