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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2. 2024

라면 연대기

7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7.     


산비탈을 오르는 데는 어느 정도 이골이 나 있는 라 군에게도 낯선 동네의 비탈길은 꽤 험했다.

그나마 라 군의 동네보다 나은 것은 오르는 골목은 마찬가지로 비좁지만,

그래도 길바닥이 시멘트로 덮여 먼지가 나거나 울퉁불퉁하지는 않다는 거였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셋집은 복덕방 주인이 말한 대로 하늘색 페인트로 칠해진 문이 있었다.

그리고, 복덕방 주인이 말하지 않은 거대한 암벽이 집 뒤에 병풍처럼 붙어있었다.

그건 마치, 

그 집을 지을 때 집의 뒷벽을 암벽에 붙여서 짓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딱 붙어서,

비라도 내리면 암벽을 타고 흐를 빗물을 온전히 그 집이 다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 암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웠는데, 

거대한 암벽의 아래에 달라붙듯 지어진 집은 암벽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구멍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집의 모양새와 그 주변의 모양새에 압도당한 어머니와 라 군은 한동안 비탈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 망할 영감이……. 그래서 보증금이 그렇게 쌌구나.     


평소 같지 않게 거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라 군은 생각했다.

저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문제보다 집안에서 언제고 암벽이 무너지거나 암벽에서 돌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버티며 지내야 하는 건가, 하고.

초조해진 라 군이 어머니의 옆얼굴을 슬쩍 다시 보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어머니의 귀밑머리에 희끗희끗하게 흰 머리카락들이 돋아나 있는 것이 보였다.

막 입을 열려던 라 군은 어쩐지 어머니가 처연해 보여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그런 라 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 미온아. 저 집 어떻겠니?

- 어, 엄마. 근데 저 집 너무 위험해 보이지 않아? 저 절벽 아래 집은 저 집 밖에 없는데…….     


라 군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옷소매로 훔쳤다.

어쩐지 어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언뜻 어린것처럼 보였다.     


- 됐다. 들어가서 보면 뭐 하겠니. 우린 저 집에 살기 어렵겠다.  

   

한숨을 쉬고 어머니가 미련 없이 돌아서자, 라 군은 이내 안심했다.

아무리 소견이 없을 불과 십여 세 소년의 생각에도,

아무리 돈이 없다곤 해도 저토록 언제 천재지변을 겪을지 장담할 수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다시 긴 비탈길을 내려온 어머니는 복덕방에 들르지도 않고 다시 라 군을 이끌고 버스에 올랐다.

한참 동안을 달려 도착한 곳은 버스의 종점이었는데,

거의 허허벌판에 가까운 종점에서 어머니는 버스 기사를 상대로 이것저것을 묻더니 다시 라 군의 손을 이끌고 어딘가를 향했다.     


- 엄마,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 어, 집이 좀 싸다고 하는 동네 이야기를 들었는데, 거기는 여기서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는구나.

- 시외버스? 먼 데야?

- 그건 아닌데, 여기가 서울의 경계선이라 버스를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한대. 거리는 그렇게 안 멀다는데.     


어머니의 말대로 시외버스가 오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어머니가 생각하고 들었던 목적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낯선 버스 창밖 생소한 풍경들이 라 군의 눈에는 그리 달갑지 않게 들어왔다.

여름을 앞두고 있어서 한창 신록이 풍성해야 마땅할 땅들은 대체로 황무지처럼 벌겠다.

포장이 깔린 도로인데도 웅덩이가 많은 데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이상스럽게도 집도 거의 보이지 않는 몇 개의 야트막한 언덕을 지나자 구불구불한 개천이 보였다.

자라면서 집과 학교 외에는 가본 일이라곤 없는 라 군에겐 즐거울법한 버스 여행이기도 하지만,

버스가 익숙하지 않았던 라 군은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애써 참고 있었다.

개천을 넘어간 버스는 버스들이 드물게 오가는 길을 따라 계속 달리는데,

라 군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형태의 집들이 도로 양쪽에 늘어서 있어서 라 군은 눈을 크게 뜬 채 지나쳐가는 풍경들을 연신 힐긋거렸다.

라 군은 무심코 어머니를 돌아보았는데, 

어머니 또한 최대한 크게 확장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라 군은 어쩐지 어머니의 표정이 곧 목적지를 앞두고도 내리기 싫어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 엄마, 여기가 무슨 동네야?

- 어? 어. 여긴 성남이라는 곳이야. 옆집 진주댁이 여기가 좀 싸고 서울도 가깝다고 분명히….     


시외버스 종점에 내린 모자는 이내 주변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버렸다.

그곳은 라 군이 사는 동네의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진짜 판잣집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판잣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산비탈까지 빼곡하니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드문드문 보이는 실개천 주변에는 국방색 텐트 같은 것들이 쳐져 있고,

그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까르르 뛰놀고 있었다.

개천의 색깔은 거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정물처럼 보였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이리저리 뛰어노는데,

라 군 모자를 발견한 아이들이 손가락질하고 종점 주변에 여기저기 늘어져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 몇몇이 수상하다는 듯 모자를 노려본다.     


- 엄마, 여기가 그 성남 맞아?

- 어? 어. 분명히 여기가 서울에서 철거민들을 위해 마련한 동네라고 들었는데….   

  

어머니도 당황했던지 말꼬리를 흐리는데,

라 군은 이따금 학교에서 틀어주던 환등기에 등장하던 6·25 전쟁의 사진들이 떠올랐다.

돌무더기들이 가득한 허허벌판 여기저기에 세워진, 

미군 부대에서 나온 나무상자들로 얼기설기 움막처럼 만들어진 판잣집 혹은 텐트.

일전에 본 그 영상들에는 꼭 어린아이들이 거의 헐벗거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걸친 채 콧물을 흘리면서 카메라 렌즈를 찌푸린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지금 모자가 보는 광경이 꼭 그랬다.     


- 여기 뭐 하러 온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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