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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5. 2024

라면 연대기

8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8.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속에서 어머니의 마른 얼굴은 무표정했다.

신세계를 찾는 야심에 찬 각오로 애써 찾아간 성남의 종점은 시비조로 말을 붙인 중년 남자의 험악스러움과 압도하는 주변의 풍광들 때문에,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종점에 도착한 시외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중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가져다 놓은 석고상처럼 낯설고 무표정했다.

아침에 라면을 먹고 나와 온종일 돌아다닌 라 군은 배가 몹시 고팠으나, 어머니의 표정에 지레 짓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어머니는 못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먼지로 뿌옇게 덮인 창밖만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내려간 모자가 다 죽을상을 하고 어둑해진 집으로 돌아오자,

종일 굶은 개가 컹컹 짖고 닭들은 닭장 안에서 꼬꼬댁거렸다.

아버지는 툇마루에서 깁스한 발을 장총처럼 앞으로 내민 채 모자가 집에 들어서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제야 라 군은 어머니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엄마, 나 배고파.     


어머니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들어섰는데도 먹이가 들어오지 않자 개는 낑낑대면서 개집으로 들어가고,

닭들은 이리저리 홰를 치며 돌아다녔다.

잠시 후 아침과 똑같이 라면 두 그릇과 묵은 김치가 상 위에 놓이자,

허겁지겁 달려들던 라 군은 젓가락을 쥔 채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 난 종일 집에 있어서 배 안 고프니 네가 다 먹어라.     

아버지의 말.     

- 나도 입맛이 없구나. 너 먹고 싶은 대로 먹어.     

어머니의 말.     


라 군은 마치 용암처럼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지도 않고 입안에 가득 욱여넣었다.

양 볼이 부풀어 오르고,

이내 뜨거움에 입안에 물집들이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지만,

라 군은 꾸역꾸역 쉬지 않고 라면을 입속으로 빨아들이고 채 씹지도 않곤 삼켰다.

식도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라 군은 김치를 집지도 않고 계속 라면만 욱여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휴, 한숨을 쉬는데,

아버지가 어머니께 묻는 말이 들렸다.     

- 그래, 집은 좀 봤어?

- 집, 봤지요.

- 어땠나?

- 뭐 그 돈으로 갈 수 있는 게 뻔하잖아요. 너무 안 좋아요.

- 성남도 다녀온다더니?

- 가봤죠.

- 그런데?

- 우리 피난 때 보던 집들하고 별 차이도 없습디다.

- 뭐야? 그럴걸 뭣 하러 미옥이는 데려간 거야? 학교도 못 가게.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홱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이 차가 많은 데다 늘 과묵한 아버지를 어려워하던 어머니가,

그렇게 정면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는 걸 본 적 없던 라 군은 모른 채 고개를 처박고 아직도 용암처럼 뜨거운 라면을 입에 계속 집어넣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면 온종일 구멍이 난 것 같던 가슴이 메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 가서, 계약서라도. 쓰게 되면. 어쩌라고요. 내가. 글. 간신히. 읽는데. 그럼 어쩌라고요.     


한 자 한 자 씹어서 뱉듯이 말을 하는 어머니에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담장 밖 한강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어두워진 한강과 그 건너편 압구정 들판은 어둠 속에 덮여있는데,

어둠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왼쪽 뚝섬 방향과 오른쪽 한강대교 쪽에서 방공 탐조등이 하늘을 휘젓기 시작했다.

매해 여름과 겨울이면 전력이 모자란다고 전기가 끊기는 날이 제법 많았는데,

밤하늘을 환히 비치는 탐조등은 이따금 야밤에 등장해서 밤새 허공을 휘젓곤 했다.

그럴 때면 라 군은 학교에서 가끔 보여준 2차 대전 때 전쟁화면들이 생각났다.

탐조등이 런던 하늘을 뒤덮고, 밤하늘에 독일 비행기들이 폭격하면 마치 불꽃놀이 같은 대공포가 밤하늘을 수놓던.

그래서인지 라 군은 탐조등이 하늘에 등장하면 늘 가슴이 불안해졌다.     


- 벌써 아홉 신가 보네. 저놈들이 또 서치를 비치는 거 보니.     


다행인 것은 그 서치라이트 덕택에 밤에 불을 켜지 않아도 마당에서 오가거나 변소를 드나들 때도 환하다는 건 좋은 점이었다.

그건 아랫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윗동네만의 특권이자, 전기세를 적게 낼 수 있는 장점이기도 했다.     


- 엄마, 그럼 우리 어디로 이사하지….     


순식간에 라면 두 그릇을 비워낸 라 군이 생각난 듯 묻자,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분의 얼굴을 밤하늘을 휘저어대는 서치라이트에 비쳐 창백하게 보였다.

잠시 마주 보던 두 분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거의 동시에 라 군에게 입을 연다.     

아랫동네 어디로든 가봐야지.     

두 분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막 대답을 하려던 라 군은 입을 지그시 다물었다.     

‘ 다른 집들은 벌써 여기저기 집을 비우고 나가던데요.’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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