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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6. 2024

라면 연대기

9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9     


아버지는 깁스한 다리에 목발을 짚은 상태로 청년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청년들은 매우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과,

한편으로 거만하게 보이는 두 가지 표정을 갖추고 아버지와 대치 중이었다.

뒤에는 어머니와 라 군이 초조한 얼굴로 말없이 손을 잡고 있고.     


- 병태 씨. 꼭 이래야 하나?    

 

아버지가 청년 중 얼굴이 익은 청년에게 사정하듯 말을 꺼내자,

늘어선 청년 중 좀 얼굴이 앳된 청년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 아, 참. 아저씨. 그럼 어떡해. 우리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우린 들 이러고 싶겠어요? 

엉? 뭐 방법이 없잖아. 방법이. 아저씨네도 이미 입주권도 받았다며. 이주비도 받고 말이야. 

그럼 날짜가 되면 나가주셔야지. 엉? 나랏법이 그런 걸 어쩌라고요.


- 그러려고 했지만! 집을 구하는 게 늦어져서 그러네. 다음 주. 다음 주까지만 어떻게 안 되나?


- 아, 거참, 이미 경고 몇 번이나 했잖아요, 아 모르겠고, 일단 짐들 대충 꾸려서 마당에 내놔요. 

두 시간 줍니다. 에? 두 시간요. 그거 넘기면 살든 말든 다 때려 부술 거니까.     


일요일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공공근로도, 라 군의 등교도 멈춘 날이라 모처럼 느지막이 아침 삼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라면을 끓여 막 먹으려던 참에,

낯선 혹은 낯익은 청년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들어선 것은.

그들은 저마다 왼쪽 팔에 초록색 완장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완장에는 그린벨트라는 단어가 노란 금실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들 중 안면이 있는 청년 몇은 좀 곤란하다는 표정이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배실배실 베어 물고 있었다.     


라 군은 아버지로부터 ‘병태 씨’라고 불린 청년이 누구인지 대강 알고 있었다.

그 청년은 동네의 산꼭대기에 있는 ‘진짜’ 판잣집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고,

대체로 못 배우고 돈 없고 줄이 없는 동네 청년들 대다수가 그렇듯 늘 산동네 주변을 맴돌며 동네 꼬마들의 코 묻은 동전을 빼앗아 술을 마시거나,

선거 나 명절 때 잡다한 동네 행사들에 나서서 이른바 ‘찬조금’을 걷기도 하는 부류라는 걸.

이따금 동네 처녀들이 지날 때 희롱하는 것을 일삼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 아버지가 지나갈 때면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었던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도.

소년 시절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다녀오고,

전쟁 때도 부상을 입어가면서도 살아낸 아버지에게 그 청년들은 햇병아리에 불과했었다고 소년은 기억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오늘 이 갑갑한 상황에서 저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 ‘강제철거’라는 나랏일을 도맡아 하게 된 모양이니 세상은 참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어머니가 평소처럼 아버지 뒤에 숨어있지 않고 나선 것은 아버지와 라 군과 그 불량배들에게도 의외의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잠시 기다리라고 청년에게 이르고,

부엌에 들어가서 동사무소에서 지원받은 라면 상자 중 남은 것 한 개를 들고 나왔다.     


- 병태 씨. 고생들이 많은데 우리 이것밖에 없으니 가져가고, 이틀만 시간을 줘요. 

그때까지 어떻게든 짐을 좀 빼보도록 할 테니.

- 어? 아이, 참. 아줌마. 우리 이런 거 받으려는 게 아닌데 거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청년은 재빠르게 어머니 손에서 라면 상자를 받아 들며 다른 청년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청년들이 비실비실 웃으며 ‘ 그럼, 낼모레까지는 꼭 빼는 거요! ’

‘ 아저씨, 거 어깨에 힘 좀 빼쇼. 다리까지 부러져서 그렇게 힘주면 또 다른 다리도 부러지는 거 아뇨? ’

서로 킬킬대며 집 밖으로 사라졌다.

라 군은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목발을 꽉 움켜쥔 아버지의 손이 하얗게 변한 것은 꼭 몸무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서 속이 좀 쓰렸다.     


어머니는 아랫동네로 내려가서 어디에선가 손수레를 빌려왔다.

라 군이 비탈 아래에서 손수레를 지키는 동안 어머니는 비탈을 오르내리며 마당에 있던 화분들을 연신 실어 오고,

비어있던 라면 상자에 닭장 속 닭들을 다리를 묶어 넣어 손수레에 실었다.

거기에 마당에서 키우던 개까지 목줄을 달아 끌고 와 손수레에 맨다는 것이다.     


- 엄마, 이거 다 뭐야? 이거 어디로 가져가려고?      


라 군의 물음에 어머니는 여러 번 오르내린 비탈이 힘겨웠는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치 하늘에 무슨 답이라도 씌어있는 것처럼 한참 하늘을 우러르던 어머니는 라 군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데,

그때 어머니의 얼굴은 어느 책에서 그림으로 본 것 같은 부처님의 얼굴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미온아. 우리 이사하면 이것들 놓을 데 없을 거야. 

개도 키울 수 없고 닭들도 키울 형편이 안돼. 그러니 시장 가서 팔아보려고.    

 

라 군은 그런 것까지는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평온해 보이는 표정을 보자 아, 하고 순간 깨달았다.

어머니에게 저 화분들이 어떤 의미였나.

여기저기 일을 다니다 길가에 거의 말라죽어가는 선인장 화분이나 반쯤 짓이겨진 화초들을 주워와서 생선 씻은 물을 줘가며 되살렸던 그것들.

아마도 어쩌면 어머니가 산동네를 살아가며 유일하게 돈 버는 것과 무관하게 해온 어머니만의 사치였을 것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강아지, 

학교 앞에서 꼬마들을 현혹해서 팔렸던 병든 병아리들이 이튿날이면 당연히 죽어가던.

그런 비루하고 무게 없어 보이던 죽음들이 어머니의 손에 들어오면 멀쩡히 살아났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잔잔한 기쁨이 드물게 보였었는데.     

어머니는 이젠 그 모든 것들을 팔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라 군은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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