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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7. 2024

라면 연대기

11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1.     


그다지 크지도 않은 시장에도 좌판을 벌이는 사람끼리는 정해진 자리가 있어서 라 군과 라 군의 어머니는 시장의 끄트머리 즈음에 자리를 잡고 주섬주섬 가져온 것들을 펼쳐놓았다.

화분들과 다리가 묶여 애처롭게 꼬꼬댁거리는 닭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주인과 나들이를 나와 그저 신이 나서 꼬리를 연신 흔드는 개 한 마리.

흘깃거리며 지나는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 라 군은 생전 처음 겪는 창피함과,

혹여 동창이라도 지나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어머니 혼자 남겨두고 도망칠 정도로 모질지 않은 라 군이라,

도리없이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발 콧등을 눈으로 좇을 뿐이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몹시도 복잡했다.     


- 미온아, 창피하지.   

  

툭 던지듯 어머니가 묻자 라 군은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 어? 어. 괜찮아. 엄마. 이거 다 팔아야 우리 돌아가잖아.

- 그래. 어차피 이거 집이 철거되면 버려질 것이고, 이걸 다 가지고 이사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것들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잖니, 그동안 키운 공이 있는데.

- 어. 나도 알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휴 하고 한숨을 쉰다.     


- 라온아. 가난한 건 창피한 게 아니야. 가난한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창피한 거지. 아버지와 나는 남쪽으로 넘어와서 열심히 살았어. 그렇게 아등바등 모은 돈으로 집을 산 거야.

그때는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이 별로 없었거든. 

강 건너 압구정이나 말죽거리에 가면 큰 땅을 살 수 있었지만, 

그쪽으로는 다리도 없고 장마철엔 홍수도 나고…….

학교들도 없어서 너 학교 보내기도 나쁘고….

말죽거리는 뚝섬에서 뗏목 타고 넘어가야 하잖아. 별로 고를 수 없었어.


- 근데 엄마. 왜 나라에서 나무를 심겠다고 멀쩡히 사는 사람들을 내쫓아?


- 내가 뭐 알겠니. 미국인가 어디에서 대통령이 왔다 갔다고 하더라. 

들리는 말로는 그때 지나는 길에 판잣집들 있는 게 너무 창피해서, 나라에서 깔끔하게 정리를 한다고 들었다.


- 하지만 우리는 돈을 내고 그 집을 산 거잖아?   

  

라 군의 물음에 어머니는 말문이 막혔는지 멍하게 시장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멍청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라 군에게 대답했다.     


- 나도 못 배워서 잘 모르지만, 가난은 창피한 건 아니지만 죄 같다. 가난한 게 죄라면 죄야. 

아니라면 이해가 안 되잖니, 그러니 미온이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가난하지 않게 실으렴.     


어머니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라 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모자가 좌판의 허름한 물건들과 닭과 개를 다 팔고 난 시간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온종일 먹은 거라고는 그들의 좌판 옆에서 파는 순대 두 줄이 전부였던 모자는 몸을 일으켜 다시 산동네로 향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머니가 정성을 들인 화분들이 모두 잘 팔려서,

어머니의 얼굴에는 희미한 희망이 저녁노을처럼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모자는 나란히 저물어가는 황혼빛이 물들어 오는 비탈길을 걸어 올랐다.

초여름이 짙어가는 계절이라 지난봄 비에 겨우내 쌓였던 골목을 뒤덮었던 연탄재들이 물줄기에 깎인 골목은 울퉁불퉁했다.

그러다 장마철이 지나야 본래의 흙길로 돌아오고,

다시 겨울이 시작되면 눈과 연탄재가 다시 층층이 퇴적되는 산동네 골목길의 순환계가 이제 그칠 것이란 것을 깨닫자,

라 군은 어딘지 모르게 침울해졌다.


벌써 동네의 몇몇 집들은 일찌감치 이사를 하고, 

비워진 집들은 철거반이라는 부랑배들에 의해 시멘트 블록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그곳에는 아직 사는 사람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들이 또 겹겹이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

한때 사람들이 살아오던 그 집들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라 군은 동네 부랑배로 돌아다니다 지금은 노란색 완장을 차고 으쓱대는 청년들이 빈집을 철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놀이하듯 휘두른 해머 몇 번에 야트막한 담장과 벽들이 마치 두부처럼 으깨어지는 것을 보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이란 생각 외로 약하고 가벼웠다.

사람들이 산동네에 집을 짓는 과정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아버지를 통해 알고 있던 라 군에게 그런 풍경들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몇 날 며칠 동안을 등짐으로 시멘트 블록을 운반하고.

모래와 시멘트 포대를 다시 등짐으로 몇 날 며칠을 지고 헉헉대면 올라와 쌓고.

그렇게 쌓인 자재들도 본인들이 돈을 벌어야 하니 자재가 쌓였다고 바로 공사를 하지도 못했다.

대체로 장마철이나 겨울이 다가와 막일 거리가 없어진 때에야 동네 아저씨 서넛이 모여,

막걸리와 돼지고기구이 몇 점을 노임 삼아 시멘트 블록을 쌓고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중에 손재주 있는 몇몇만이 얼기설기 목재로 지붕을 올릴 수 있었고, 

그 위에 시커먼 아스팔트 펠트를 깔아 비를 피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는 내부 벽에 시멘트를 바르고, 돈이 좀 있는 집은 도배지를, 돈이 모자란 집은 신문지를 바르는 거로 끝이었다.

어렵게 온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시멘트를 발라 바짝 마르면 그때부턴 어머니들이 풀 바른 창호지를 겹겹이 바닥에 붙이고, 그 창호지들이 마른 후에는 콩기름을 먹인 면포로 온종일 창호지 위를 문질러 반들반들 광을 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집들은 독한 시멘트 냄새와 지붕을 이은 마르지도 않은 생나무 냄새,

그리고 바닥 장판에서 올라오는 콩기름 냄새로 뒤범벅이 되곤 했다.


나름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그 집들이 부서지는 것은 망치질 몇 번이면 된다는 것이, 

라 군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힘겹게 산비탈을 올랐지만, 그래도 아침에 들고 내려간 물건들이 다 팔려 살짝 기분이 들떴던 어머니와 라 군은 그들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없었다.

아침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내려갔던 그들의 집이 그곳에 없었다.

그들이 아침에 라면을 끓여 먹고 나섰던 집은 깨어진 시멘트 블록들이 가득 쌓인 폐허가 되어있었다.

무너져 내린 그들의 삶터는 그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너무 작아 보여서,

라 군은 이곳이 내가 살던 그 집이 맞나, 혹 착각하고 잘못 올라왔나 싶었다.

멈춘 듯 서 있던 라 군과 어머니가 그곳이 자신들의 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 폐허의 끝에 무너진 기둥처럼 웅크린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한 뒤였다.

한강의 조망을 자랑하던 그의 집터 언저리에 무너진 블록 더미 위에,

라 군의 아버지가 폐허의 일부분처럼 무너진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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