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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18. 2024

라면 연대기

13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3.     


구멍가게 아저씨가 목을 맨 다음 날 라 군네는 아랫동네로 이사했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아랫동네에서 돈을 주고 빌려온 손수레에 실릴 정도이긴 했지만,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라 군이 뒤에서 손수레를 밀며 – 경사 때문에 미는 것보다는 굴러가지 않게 잡고 있는 게 많았지만 – 그들이 도착한 아랫동네의 새로운 집은 어찌 된 것이 그들이 윗동네에서 살던 집보다 나아 보이질 않아 라 군은 살짝 실망했다.


그곳 역시 비좁은 골목 안쪽에 있는 집이었는데,

빨간 시멘트 기와를 이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야트막하고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려진 살짝 기울어진 모양새가 원래 라 군이 살고 있던 집보다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비탈은 없었다.

아랫동네 시장 끄트머리에 있는 집은 비록 볼품은 없었지만, 산동네가 아니었고,

그래도 하나 나은 게 있다면 라 군네가 이사할 원래‘창고’였다는 방과 주인집이 사는 곳이 나누어진 구조라 라 군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돈을 건네고, 뒤에 멀찍이 서 있던 라 군과 아버지를 손짓으로 불러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라 군은 집에 들어서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녹슨 양철판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자 수챗구멍이 바로 보이는 부엌 비슷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두어 발짝 넘어서 방문턱이 있었다.

방 문턱을 넘어 바로 방이 있고 그 방문과 마주한 벽에는 조그만 창문이 나 있었는데,

그것은 대낮인데도 컴컴한 가운데 아주 빈약한 빛줄기가 희미하게 젖어 들 듯 비치고 있었다.

어제 시멘트를 바른 탓인지 방 안에서 독한 시멘트 냄새가 훅 끼쳐왔다.

당황한 라 군이 어머니의 얼굴을 뭔가 묻는 듯 바라보자, 

라 군의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미온아. 여기가 이제 우리가 살 집이야. 전에처럼 마당이 있고 방도 더 있고 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산에 올라갈 필요도 없고 겨울에 눈이 쌓여 미끄러질 걱정도 없잖니. 게다가 시장도 가깝고. 

네 학교도 걸어가는 게 좀 줄어들었지. 좀 어둡고 갑갑하겠지만 우리 이제 열심히 살아서 더 넓은 데로 이사 가야지. 그래도. 이 집에서는 수도가 나오니까 우리 물 길으러 다니지 않아도 돼.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라 군은 차마 ‘ 우린 그럼 그동안 열심히 안산 거야?’라고 물을 순 없었다.

그보다는 좀 더 실용적이며 실제적인 물음이 라 군에게서 나왔다.     


- 근데 엄마. 저 시멘트 바닥에 장판은 언제 깔지? 그리고 우리 변소는 어디를 가야 해?     


어머니가 마치 집주인처럼 나서서 이리저리 소개했다.

수도는 주인집의 안마당- 사실 이건 안마당이라기보다는 그냥 주인집 방으로 들어가기 전의 조그만 공간에 불과했지만 – 가운데 있었고, 수도꼭지 아래에 붉은 함지박이 있어서 그 안에 똑똑 떨어져 고인 물을 바가지로 들통에 퍼서 라 군네 부엌에 가져다 쓰는 형태였다.

처음 라 군이 보았던 방 뒷벽의 창문 밖은 뒷집의 담장이 가려져 있어서 어두웠던 곳인데,

그곳에는 사람 하나 움직일 정도의 길이 있었고 변소는 희한하게도 뒷집 담장 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어서 변소로 가려면 집 밖으로 나가서 라 군네의 방을 끼고 뒤로 돌아 들어가야 했다.

어쩌면 주인집과 변소를 공유해서 쓰기 위해서는 그게 편한 구조일 수도 있었다.

라 군의 어머니가 라 군에게 비좁은 통로에서 변소의 위치를 손가락질하며 막 설명하려던 차에,

라 군 또래의 여자애가 변소에서 막 나오는 게 보였다.     


- 어?     


놀라는 라 군을 본 그 여자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더니 흥, 콧소리를 내며 반대편 통로로 사라졌다.

그 모양새를 보곤 어머니가 라 군에게 물었다.     


- 너 쟤 아니? 주인집에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하고 중학생 딸이 있다고는 하던데.

- 어? 어. 초등학교 2, 6 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이름이 오 영애라고.

- 그래? 잘됐다. 너랑 아는 애니까 다행이야.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라 군은 이게 과연 다행인가 싶은 마음이 들어서 갑자기 배가 좀 아파졌다.

라 군의 기억에 그 여자애와는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이 얽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라 군은 외동아들이라 또래와 비교해 좀 어려 보이기도 했고 체구도 작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어머니와 목욕탕에 다녔었다.

산동네에 살면서 자주 목욕탕을 가진 않았지만,

겨울에는 물 길어오기도 어렵고 잘 못 씻어서 그런지 이따금 어머니는 라 군을 이끌고 목욕탕에 갔었고, 라 군은 그게 당연한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욕탕 입구에서 삐죽 얼굴을 내민 계산대에 앉은 아줌마가 라 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머니께 이 아이가 여탕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서,

그제야 라 군은 아, 이젠 내가 여탕에 들어가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들은 것이다.

지난달도 함께 들어갔노라, 박박 우기는 어머니 덕분에 그냥 들어오긴 했지만,

등 뒤로 계산대 아줌마가 ‘담부턴 안 돼요! 쟤가 어딜 봐서 애기유!’ 하는 말이 들려와서 라 군은 얼굴이 벌게졌었다.


탈의실은 꽤 사람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라 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마다 옷을 벗거나 입느라 바빴다.

그때 가녀린 비명 같은 게 들렸다.

라 군은 뭔가 싶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얼굴을 돌렸는데, 그곳에 오 영애가 서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영애가 라 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명을 지르는데 그 뒤에 서 있던 아줌마가 황급히 영애를 끌어 뒤로 숨기는 게 라 군의 눈에 보였다.

그때만 해도 라 군은 왜 저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지 깨닫지 못해서 어리둥절,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린 채 있었다.

학교에서 가끔 마주치긴 했었지만 2학년 때 한 반 짝꿍이던 시절을 빼면 별로 친한 기억은 없었는데.

대체 왜 저 애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근데 왜 쟤는 가슴이 불룩 나온 거지?

어디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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