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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23. 2024

라면 연대기

12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2.     


문득 라 군은 무너진 집 귀퉁이에 오도카니 앉아 장총을 내밀 듯 깁스한 다리를 내민 아버지도 집과 더불어 무너져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철거는 내일모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하고 높낮이가 없어서 라 군은 순간 어머니가 ‘식사는 하셨어요?’라는 식으로 아버지에게 묻는 줄 착각했다.

아버지는 서서히 깔려오는 석양을 받으며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 그 자식은 안 보이더라고. 새로운 놈들이 들이닥쳤고 병태 이야기를 해도 모른다고 했어. 

이놈들에게 줄 만한 라면도 더는 없었고, 짐을 모조리 마당에 내팽개치고 그냥 다 부숴버렸네.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남 얘기하듯 담담하게 대답하는 아버지를 보며 라 군은 온종일 시장에서 웅크려있던 굶주림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가 태어나 자라왔던 집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이미 그것은 집이 아닌 그저 부서진 시멘트 블록의 무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폐허의 무더기에 그를 낳은 아버지도 폐허처럼 부서져 있었다.

아버지는 마치,

전쟁터에서 총알이 다 떨어진 채 사흘 동안 고지를 지키다 굶주림에 지쳐 저항을 포기해 버린 낙오병처럼,

이미 비어버린 총구를 맥없이 앞으로 내민 낙오병처럼 깁스한 다리 한쪽을 앞으로 내밀곤 고개를 수그린 채로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 미온아.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아랫동네에 말해둔 집에 가서 사정을 좀 해봐야겠다.     


무력하게 서로 일치하지 않는 눈빛만 바라보는 아버지와 라 군을 일깨운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 작은 몸으로 종일 밖에서 오그려있다가 힘겹게 비탈길을 오르고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씩씩거리며 전사처럼 아랫동네를 향해 잰걸음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 군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 아버지, 밥도 못 드셨죠.    

 

아버지는 라 군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속이 비어있는 풀빵 봉투처럼 보여서 라 군은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 너야말로 엄마와 시장에 종일 있느라 밥도 못 먹었겠구나.


라 군은 문득,

시장에서 판 화분들과 닭값이 주머니에 든 것을 생각했다.

어머니에겐 미안하지만, 그것으로 구멍가게에 가서 빵이라도 몇 개 사 오려고 생각하곤,

아버지에게 잠시 기다리시라 하고는 가게를 향해 골목을 달음박질쳤다.

태어나 자라며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산동네의 골목이 어쩐지 낯설었다.

어떤 집들은 5촉짜리 알전등이 위태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지만,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면 당연히 있어야 할 어떤 집들은 돌무더기처럼 쌓여서,

어슴푸레 어둑해지는 저녁노을에 기괴한 무덤들이 돋아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풍경들은 십여 년 넘게 그곳에서 자라난 라 군에게도 무척이나 낯선 풍경이어서 이미 여름에 접어든 계절인데도 라 군의 가슴은 차가워졌다.

여느 때라면 이 집 저 집에서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준비하는 냄새가 가득하고,

아이들이 어둠이 들어선 골목을 먼지를 휘날리며 뛰어다녀야 할 시각인데도 마을은 고요했다.


어설픈 계단들을 뛰어올라 구멍가게 입구로 오른 라 군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어제저녁까지도 멀쩡하던 구멍가게는 조금 전 보고 온 자신의 집처럼 시멘트 블록 무더기로 변해있었다.

구겨진 양철로 만들어진 간판은 바닥에 깔려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십 원짜리 지폐처럼 꾸깃거리고,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던 가게 앞길까지 산산이 부서진 시멘트 블록 조각들이 쌓였는데,

그 사이사이로 가게 좌판에 올려있던 물건들이 집의 파편들 사이로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라 군이 빠르게 파편 더미들을 훑어보았지만,

그 무더기 속에 뭔가 쓸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라면이라거나 빵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고, 작은 과자봉지와 캐러멜, 알록달록한 아폴로 봉지 같은 것들이 돌무더기 사이에 쓰레기처럼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구멍가게 옆,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전봇대에 뭔가 커다란 덩어리가 매달린 것이 보였다.

그리 높지도 않은 나무 전봇대는 삭을 대로 삭아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 전봇대에 누군가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것을 라 군은 깨달았다.

그건 마치, 가끔 성탄절에 과자를 받으러 드나들던 동네 천막 교회 속 중앙에 있던 십자가를 연상시켰다.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스러운 표정의 사내와 달리,

전봇대에 매달린 사람은 고통도 무엇도 없는 평온한 얼굴로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매달린 사람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잘 안 보이긴 했지만, 라 군은 거기 매달린 사람이 구멍가게의 주인아줌마 남편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라 군은 산등성이 꼭대기의 판잣집들을 제외하면 윗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구멍가게의 무덤 앞에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누군가 이 당황스러운 풍경을 함께 공유할 수 있을 사람을 찾는 심정으로.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엊그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미 거의 태반이 한 줌 돌무더기로 변해버린 집 자리들과,

남아 있더라도 거의 불빛이 없는 허름한 검은 지붕의 집들.

여기저기 남은 집들의 굴뚝에서도 저녁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라 군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고 고개를 휘휘 둘러대며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윗동네는 거의 불이 꺼진 상태로 거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는데,

그 아래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져 가는 아랫동네가 환하게 보였다.

문득 라 군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사는 동네에는 가로등이라는 게 없었다.

아랫동네와 멀리 보이는 뚝섬 근방에도 불빛이 하나둘 켜져 가는데 그저 어둠에 속수무책으로 뒤덮이고 있는 것은 그가 서 있는 윗동네와 멀리 보이는 한강 너머 압구정뿐이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 라 군이 달려오느라 흘린 땀을 훔쳐냈다.

라 군은 이른 여름밤임에도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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