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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24. 2024

라면 연대기

14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4.   

  

그 일이 있고 나서,

라 군은 학교에 가면 여자아이들이 자신만 보면 서로 쑥덕거리다 외면하는 일을 겪었다.

처음에는 눈치도 채지 못했고 여자애들과 별로 친하지도 않긴 했지만,

그와 사이가 나쁘지 않던 짝꿍 인숙이가 자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상황이 되고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깨닫는 라 군이었다.

인숙이를 추궁하자 인숙은 ‘ 너 여자목욕탕에 온다며?’라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말을 했고,

라 군은 이 모든 사단이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영애의 입에서 시작된 것을 알았다.

뭔가 억울하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여탕에 들어간 게 사실이기도 하니 딱히 뭐라 항변할 거리가 없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 잠시 잠잠하더니 6학년에 올라가 하필이면 영애와 같은 반이 되는 바람에 다시 소문을 끌고 돌아다녔다.

그 덕분에 라 군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태라면’이라는 기이한 별명으로 불렸었다.  

   

그랬던 기억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영애의 집에 세를 들다니.

게다가 이사 온 날부터 변소에서 나오는 영애와 마주치다니.

라 군은 자신이 태어나 자라온 집이 강제철거를 당한 이후부터 어째 인생이 몹시 꼬여간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숫기가 적던 라 군은 아랫동네로 이사를 온 후 더 말수가 적어졌다.

슬슬 사춘기에 들어갈 나이가 돼가는 이유도 있었지만,

늘 밝은 해가 비치는 곳에서 살다 늘 어두컴컴한 집안에 들어가는 것도 싫었고,

그 안에서 수돗가, 변소를 오가면서 영애와 마주치는 것도 거북한 일이었다.

라 군과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영애는 ‘흥’하고 콧소리를 내며 돌아서 가버리곤 했다.

집에 들어서면 늘 어둑한 방에서 아버지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라 군이 들어서면 목발을 짚고 어렵게 어렵게 방을 나섰다.

마치 유폐된 귀양살이처럼 아버지는 자신을 스스로 밖에 내놓기 싫어했다.

유난히 키가 큰 아버지가 다리를 절룩이며 목발을 짚고 다니기에는 힘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라 군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온다며 점점 늦게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도서관에 가게 된 것은 어두운 방과, 그 방안에 미라처럼 말라가는 아버지를 보기 싫은 탓도 있었지만 이내 라 군은 도서관에 가득한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저녁이 되었다.

어둠이 동네를 뒤덮은 다음에야 라 군은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쯤이면 어머니도 공공근로 현장에서 돌아와 막 저녁밥을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도 밥을 안치기 어려운 시간이 많아 예전보다 잦게 라면을 먹는 경우가 늘었다.

영세민 지정이 된 이후로 라면값은 꾸준히 낮아져서 꽤 후하게 라면을 받은 라 군네는 자주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때우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방황하던 라 군은 어느 날부터 슬그머니 방구석 상자 속 라면을 한두 개씩 빼서 책가방에 넣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양은 도시락 가득 밥과 김치 또는 볶은 멸치 등속을 반찬으로 등교하지만,

오후에 하교하지 않고 도서관을 맴돌다 보면 늘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앞 좌판에서 파는 떡볶이나 만두를 사 먹을 돈이 없던 라 군은 도서관 뒤편 언덕에 올라가 생라면에 수프를 부어 조금씩 부숴 삼키곤 했다.

그렇게 바짝 마른 라면을 먹다 보면 입안이 찢기기도 하고, 목이 메어오면 학교 운동장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삼켰다.

그러면 뱃속에서 라면이 불어나는지 포만감이 느껴지며 약간 불쾌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라면 수프의 짭조름한 트림이 올라오곤 했다.     

변두리 중학교의 도서관 책들은 동네만큼이나 허술하고 결핍이 되어 있어서,

몇 달 도서관을 전전하자 더는 읽을거리도 없어졌다.


그때부터 라 군은 학교가 끝난 뒤 머물던 도서관을 떠나 이곳저곳 빈터를 찾아 전전하기 시작했다.

개발이 되지 않은 동네는 아직 울창하진 않아도 나무들이 듬성듬성 모인 곳들이 있고,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그늘들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 라 군이 자주 이용하게 된 곳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그마한 산등성이 기슭이었는데.

전해 듣기에 그곳은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카시아 덤불들과 잡초들, 쓰레기들이 드문드문 쌓인 버려진 것 같은 언덕에 불과해서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라 군이 그곳을 찾게 된 이유는,

아랫동네로 이사를 한 이후로 한강을 볼 수 없었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산동네에 태어나 당연한 듯 흐르는 한강을 멀리 내려다보며 자란 라 군에게,

매일 빛이라곤 한 줌도 들어오지 않는 움집 같은 집에 병든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었기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라 군의 집이 있던 산동네도 보였는데,

벌써 그곳에는 나무들이 가득 심겨 제법 울창한 숲처럼 보였다.

나라에서 내세운 ‘그린벨트’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장면이긴 했는데,

그곳에 심긴 나무들은 가시들이 뾰족하게 돋은 가지가 많아 함부로 드나들기 어려웠다.

게다가 나무를 보호한다고 철조망까지 처져 있어서 주변 아이들은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해도,

거친 나무들 때문에 온몸에 생채기를 입기 일쑤였으니까.

게다가 철조망에는 하얀색 양철판에 붉은 글씨로 무시무시한 경고도 붙어있었고.

그곳에 심어진 나무들은 가까이하기에는 불편했지만,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산동네에서도 꿋꿋이 잘 자랐고 때가 되면 향긋한 냄새의 흰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 지나는 사람들의 코를 킁킁거리게 만들곤 했다.


그 나무는 아카시아라고 했다.     

자신이 자라난, 그리고 산산이 깨어진 집의 자리에 가득하게 메워진 나무들을 바라보면 라 군은 뭔가 억울하긴 했지만,

그가 이전에 바라보던 동네와 비교하면 그래도 보기에 좋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곳에는 잿빛 판잣집들은 없고,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보기 좋게 깔려있었으니까.

비록 드나들 수는 없는 닫힌 숲이었지만.     


- 야, 너 여기서 뭐 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라 군은 화들짝 놀라며 삼키던 라면이 목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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