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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25. 2024

라면 연대기

15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5.     


인적이라곤 없던 기슭 덤불 속에 앉아 하릴없이 생라면을 씹던 라 군에게 들려온 느닷없는 목소리.

게다가 소녀의 목소리.

라 군은 사래가 들린 가슴을 탁탁 주먹으로 두드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집 딸’ 오 영애가 거기 비탈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 뭐..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라 군의 반사적인 말에 영애는 피식 웃으며 비탈을 내려온다.

여자 중학교 동복을 입은 상태로 조금 비칠거리며 내려온 영애는 라 군이 앉아있는 곳으로 내려오자 먼지를 일으키며 멈췄다.

평소에 집에서 마주치는 일 이라고는 아침에 등교할 때나,

뒤꼍의 변소 앞에서 민망하게 마주치는 것 외에는 없었던 그 아이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늘 마주쳐도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뒤돌아가던 그 아이가 왜 자신을 아는 체하는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던 라 군은 공연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벌게졌다.

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온 영애는 쭈그려 앉아있는 라 군과 그가 깔고 앉은 포장박스와,

주변에 널려있는 라면 봉지들을 휘휘 둘러보더니 이내 라 군으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진 나무에 등을 기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 내가 어디서 나오던? 여기가 네 산이냐? 라면군?     


입꼬리를 비틀며 대답하는 영애에게 라 군은 말문이 막혔다.

아마 더 어린 초등학교 시절 같으면 책상에도 칼로 영역구분을 하던 시절이니 먼저 자리 잡은 내가 여기 ‘주인이네’라고 큰 소리를 쳤겠지만,

지금은 그런 오기를 부릴 나이도 아닌 것이다.     


- 어, 여긴 내가 아지트로 삼은 지 한 달이 넘었다고. 그러니까....     


버벅대며 꺼내는 라 군의 말을 영애가 비둘기처럼 가로챘다.     


- 뭐, 그래서 뭐. 이게 니 땅이냐고. 그거 아니잖아. 그나저나 학교 종례하곤 집에 안 가고 이렇게 땡땡이치는 거 너네 아빠 엄마가 아냐?     


라 군은 이 맹랑한 계집아이의 속을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거의 칠십여 명 가까웠던 초등학교 2학년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로 서로의 이름을 온전히 기억하는 건 어렵다.

라 군의 경우는 워낙 특이한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다 보니 대부분 기억을 하는 것이고.

영애 같은 경우는 늘 단정한 양갈래 머리를 땋고 해사한 블라우스 같은 옷에 개나리색 스커트 같은 것을 입고 다녀서 유난히 반에서 눈에 띈 존재라 라 군도 이름을 기억하는 것일 뿐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게 예쁜 것도 아니지만 변두리 초등학교에서 단정한 옷차림으로 등교하는 것 자체가 뭔지 모르게 아이들 사이에선 ‘부티’가 나는 것이었고,

말수도 적어서 늘 존재하는 듯 아닌 듯 보이던 아이.

처음 셋방의 주인집 딸로 그 아이가 등장했을 때는 창피함과 민망함도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소위 ‘부잣집’ 딸로 보이던 그 아이가 비록 ‘주인집’ 이기는 해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 집의 딸이라는 것에 의외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마주칠 때마다 흥 하며 돌아서는 그 아이에 대해 굳이, 다른 감정도 없었고 서운할 것도 없었다.

라 군 역시 그 아이의 집에 단칸방에 들어가 있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장 의외인 것은 그토록 새초롬을 떨던 아이가 왜,

이곳에서 나타나 마치 어제저녁까지 함께 놀기라도 했던 것처럼 심하게 아는 체를 하느냐 말이다.     


- 그건 뭐 네가 알 바 아니고. 넌 왜 여기 이런데 온 건데.     


라 군의 말에 영애는 눈을 흘기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여기가 어떤 덴데. 너야말로 여기서 생라면 까먹으며 놀다가 집에 가나부지?     

당연한 영애의 추측에 뭐라 대꾸할 말도 없던 라 군은 칫, 소리를 내며 먹던 라면 봉지를 주섬주섬 책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 야, 너네 엄마한테 안 이를 테니 그 라면 좀 줘봐.

- 뭐?     


얼떨결에 영애가 시키는 대로 내민 라 군의 손에서 여자아이는 냉큼 봉지를 채갔다.

그러더니 부스럭 거리며 남은 생라면을 한 움큼 꺼내어 오도독 거리며 씹었다.

그녀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이 나타나다 사라졌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한 움큼을 꺼내 우물거리며 생라면을 먹는다.

이 모든 게 낯설고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전개라,

라 군은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한 채 영애가 하는 냥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기슭에 기대앉은 영애의 교복 치마가 밀려올라가 흰 종아리가 볕에 비쳤다.

그녀는 맨다리에 흰 레이스 목양말, 그리고 흰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시절처럼 영애는 교복을 입었어도 어딘가 조금 ‘공주과’ 같은 느낌이 났다.

세 주먹을 먹고 나서야 영애는 마른기침을 하며 봉지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라 군을 바라보는데,

무심결에 그녀의 종아리를 바라보던 라 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라 군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신의 곁에 내려놓은 청록색 가방을 열더니,

‘형광펜’이라 불리는 굵은 펜을 꺼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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