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능선오름 Jan 26. 2024

라면 연대기

16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6.     


그녀는 저게 뭔가 싶어 바라보는 라 군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형광펜의 뒷 마개를 빼더니 열린 구멍을 기울여 뭔가를 살살 꺼낸다.

거기서 나온 물건은 그 또한 라 군의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영애는 거기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고, 이어서 따라 나오는 것은 돌돌 말린 성냥과 종이였다.

라 군이 가만히 살펴보니 그 종이는 성냥갑 겉에 붙은 마찰 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영애는 익숙한 손짓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 알을 종이에 긋더니 담뱃불을 댕기는 것이다.     

후, 하고 연기 한 모금을 허공에 뱉은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라 군을 보며 픽 웃었다.     


- 왜, 쫄리냐?      


라 군은 늘 공주처럼 입고 다니던 그 아이가 사는 집이 생각보다 판잣집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보다 지금이 더 놀라웠다.

자신은 그 판잣집 같은 집에 단칸방 세를 들어 사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늘 새초롬하고 도도해 보이던 애가 이렇게 야산 기슭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담배를 피워문다는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라,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 너도 내 비밀을 하나 알려줬으니 쌤쌤이야. 내가 이제 네 엄마한테 너 땡땡이치고 다니는 거 안 일러바칠 거란 말 믿지? 나도 이렇게 다 보여줬잖아.  

   

뭔가 이상한 논리였지만 라 군은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란 라 군에게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빼곤 기억에 없는 물건이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자주 피우지는 않았었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담배 포장지와 속에 든 은박지와 겉을 싼 투명 셀로판지를 분리해서 가져오게 시켰었고,

뭐에 쓰는지는 모르지만 그걸 가져오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대나무 잣대로 손바닥을 맞았기 때문에 때때로 월요일 아침이면 라 군도 아버지에게 담뱃갑을 비워달라고 생떼를 쓴 적도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다리를 다친 이후로는 담배를 끊어서 담배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했는데.

마치 어른처럼 그럴싸한 모양새로 연신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던 영애가 입을 열었다.   

  

- 너도 피워볼래?     


라 군은 느닷없는 출현에 느닷없는 행동을 보이던 그녀가 자신을 향해 마치 권총처럼 불붙은 담배를 겨누자, 잠시 멈칫했다.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구나 그걸 중학생에 불과한 여자애가 권하리라곤 생각도 해본 일이 없어 당황스럽지만,

그보다는 뭔지 그 아이에게 얕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라 군은 말없이 그녀에게서 절반쯤 태워진 담배를 받아 들었다.

한참 담배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한 자세로 손가락을 우물쭈물하던 라 군이 심호흡 한 번과 함께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콜록, 콜록!     

갑자기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에 닿자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연신 기침을 해대는 라 군의 손에서 담배를 낚아채긴 영애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자신의 입에 물더니 라 군의 등을 쾅쾅 두드렸다.     


- 너, 담배 한 번도 안 펴봤구나? 그런데 뭔 오기야?

- 당, 당연히 안 피어봤지. 중학생이 무슨 담배를 피우냐. 콜록.

- 야, 너네 학교에도 담배 피우는 애들 꽤 많아. 담배 좀 피운다고 다 날라린 줄 아냐?     


발작적인 기침에 눈물이 눈꼬리에 맺힌 채로 라 군은 남은 담배를 피워내고 꽁초의 재를 털어내는 영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어른이 뭐 별거냐? 어차피 나중에 다 피게 될 거, 지금 좀 미리 핀다고 뭐 달라지냐.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끄며 일어서는 영애는 어쩐지 라 군이 보기에,

그보다는 훨씬 어른에 가까워진 듯 보인다.

라 군은 지기 싫어 피워본 담배가 오히려 그녀에게 자신을 더 얕보이게 만드는 촉매가 된 것 같아 영 거슬렸지만, 방법이 없다.

형광펜에 남은 성냥을 말아 넣은 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나저나 넌 왜 생라면을 먹어? 끓여서 먹어야 더 맛있는 거 아냐?     


영애의 말이 맞긴 하지만, 대체 어디서 라면을 끓인단 말인가.

집에서는 겨울에는 연탄 화덕에, 불을 때지 않는 계절에는 석유곤로 (焜炉, こんろ/コンロ= 풍로)를 써서 라면을 끓이지만, 그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생각 끝에 나오는 말은 라 군의 생각에도 엉뚱했다.     


- 넌 생라면 처음 먹어보냐? 아까는 뭘 그렇게 쩝쩝거렸냐?     

- 어, 처음 먹어봤는데?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답에 오히려 라 군의 말문이 막혔다.     


- 라면…. 생라면을 처음 먹어봤다고? 너네는 라면 안 먹어?

     

라 군의 말에 영애는 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 어. 우리 엄마는 라면 안 사줘. 그거 몸에 안 좋은 거라고. 칼국수는 가끔 해주지만 라면처럼 비닐봉지에 든 것들은 천박하다나.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연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