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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an 31. 2024

라면 연대기

17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7.     


라 군은 전혀 의외인 영애의 대답을 듣고 잠시 멍청해졌다.

자신은 그렇게나 좋아하고, 거의 주식처럼 먹어대는 라면을 싫어하다니,

아니 아예 천박한 음식이라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러고 보니 영애의 엄마는 항상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는 집에 살면서도 늘 도도한 모습으로 다니던 게 생각났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와 큰 나이 차가 있지도 않았을 건데도 그녀의 엄마는 항상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빨간 입술연지를 바르고 시장통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었다.

거기에 비하면 늘 머리에 수건을 둘러싸고 작업복 같은 것을 입고는 한 손에 삽을 들고 취로사업장을 나가는 라 군의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 같긴 했다.     


- 너, 내 동생 있는 거 모르지?     


영애가 다시 자리에 풀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 내게는 한 살 차이 여동생이 있어. 원래 우리 엄마는 나부터 리틀엔젤스를 보내려고 했지. 

그런데 시험장에서 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떨어진 거야. 

동생은 달랐어. 나름 재주가 좋았는지 어쨌는지 걔는 일찌감치 리틀 엔젤스를 가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일본, 홍콩에도 공연하러 다녔대.

그 바람에 엄마는 항상 걔 뒷바라지에 바빴지.

나는 늘 뒷전이고. 어릴 때도 나는 그냥 바지 입고 뛰어놀고 싶었지만,

엄마가 늘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으라고 강요해서 울면서도 할 수 없이 그렇게 다녔어.

한마디로 우리 엄마는 딸들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었나 본데,

그 덕분에 남의 집 자가용 운전하는 우리 아빠만 골이 빠지게 고생이지. 

     

넋두리하듯 늘어놓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라 군은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어렴풋이 그녀의 어머니가 좀 유별난 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늘 도도하고 어머니를 내려보듯 하는 그 주인아줌마 – 영애의 어머니 – 가, 

라 군에게만큼은 늘 웃으며 말을 걸고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주는 것이 좀 의아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 그 여편네가 자기는 아들이 없어서 그래. 네가 학교에서 상도 받고 공부 좀 한다고 하니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라고 말을 하며, 어깨를 펴곤 했다.     


- 그런데 그년이 이제 변성기가 되어서 리틀엔젤스에서 쫓겨난다 이거야. 어쩌냐? 

기숙사에서 호화롭게 부잣집 달들하고 살던 애가 이렇게 후진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서. 

나야 뭐. 어차피 엄마에게 밉보인 자식이니 상관없다만. 

어쨌거나, 난 그년 때문에 초등학교 내내 엄마에게 시달리고 비교당하고 그랬어. 

이제 뭐 똑같은 상황이 된 건가? 아무튼, 내가 담배 피우는 건 너도 비밀이야. 알겠지? 

그런데, 너네는 라면은 항상 많더라?     


그게 나라에서 영세민에게 지원이 되는 거라곤 차마 말하기 싫은 라 군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나도 라면 먹어보고 싶은데, 너 어차피 라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거지? 

생라면으로 먹으면 아까우니 끓여 먹는 게 어때?

- 어떻게? 어디서?

- 너 등유 버너라고 아니?

- 그게 뭔데?

- 아빠가 운전해 주는 자가용차 주인집에서 쓰다 버린 거 주워온 게 있는데, 그게 야외에서 불을 피워 쓰는 거래. 등유를 넣고 펌프질을 하면 불이 붙지. 그거에다가 냄비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끓여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걸 다 네가 가져온다고?

- 그래. 넌 너희 집에 많은 라면을 가져오고. 그러면 생라면보다는 맛날 거 아냐?  

    

그날 어둑해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온 라 군과 영애는 집에서는 서로 모른 채 하고 지내기로 하곤 시장에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라 군은 그날 밤 어두운 잠자리에 누워 대체 왜 그동안 새침데기처럼 굴던 영애가 자신에게 속을 다 보여주고 친근에 가깝게 구는 건지 궁금증에 잠을 설쳤다.

만약 그녀의 집에 우연히 세를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 희미하게 잊혔을 아이.

그건 짐작하건대 그녀에게 있어서 라 군도 같은 무게일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서먹함에 가깝던 사이.

서로가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으며,

목욕탕 사건이 아니라면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의 거리감.


그런데,

또 다른 우연으로 인근 야산에서 라 군이 생라면을 씹는 걸 보았다고 해도,

그녀가 모른 채 지나갔어도 될 일이었다.

굳이 담배를 피우려면 다른 야산들도 많은 동네였으니까.

그런데 굳이 아는 체를 하고, 평소 같지 않게 말을 길게 걸고,

묻지도 않은 동생 이야기와 엄마에게 소외당한 이야기까지.

어찌 생각하면 자신에게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수다스럽게 라 군에게 털어놓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라 군은 혼란스러웠다.     


이튿날 등교를 하는 길에 집 앞에서 라 군은 영애를 마주쳤다.

영애는 어제 일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냉랭하다 싶을 정도의 무표정으로 라 군을 흘깃 보고는 흥, 하며 돌아서 골목을 걸어 나갔다.

라 군은 어제 저 아이가 한 이야기들이 정말로 사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워 고민하던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뭔지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딘가 엷은 아쉬움을 더듬으며 골목을 빠져나온 라 군은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 야! 너 뭘 그리 멍청하게 있냐?  

   

라 군의 어깨를 아프게 두드린 건 바로 영애였다.

영애의 얼굴을 본 라 군은 반갑기도, 언짢기도, 당황스럽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솟았다.     


- 뭐, 네가 알 바 아니고. 왜?

- 왜긴? 내가 어제 석유 버너 가져온다고 했잖아. 이거 그럼 내가 들고 학교 가라고?     


손을 내민 영애의 손에는 국방색 주머니가 대롱거리는데, 

크기가 광석 라디오 정도로 꽤 묵직해 보였다.     


- 근데? 그래서 나 보고 그 버너 가지고 학교 가라고?    

 

반문하는 라 군에게 영애는 입꼬릴 비틀며 웃었다.     


- 야, 학교에 가져갔다 뺏길 일 있냐. 너네도 수시로 가방 검사하잖아? 

가는 길에 어제 그 산에 숨겨 놓고 가라고.

- 뭐? 아침 등교 시간인데? 

- 야, 하루쯤 지각해도 안 죽어. 넌 애가 꽉 막혔냐?

- 아니…. 그래도….     


라 군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너 주머니를 라 군에게 넘긴 영애는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골목을 나오면 바로 시장판이고,

사람들이 일찌감치 출근하느라, 등교하느라 복작대는 판에 영애를 부를 수도 없다.     

‘아…. 이런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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