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능선오름 Feb 02. 2024

라면 연대기

18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8  

한참 동안 엊그제 읽었던 그리스 신화와 취로사업과 어머니에 관한 생각들이 뒤엉켜 있던 라 군을 퍼뜩 현실로 돌려보낸 건,

익숙하지 않은 냄새 때문이었다.

영애는 국물 한 방울 남지 않은 냄비를 곁에 물려놓고,

무릎을 감싸 안은 자세로 앉아 지난번보다 더 익숙해진 모습으로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린다.

그녀의 곁, 책가방 위에는 역시나 형광펜이 머리가 벗어진 모습으로 구르고 있고.     

‘후’하고 담배 연기를 어른스럽게 피워 올린 영애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껏 담배를 빨아들였다.

담뱃대 끝에서 붉은 불빛이 반짝이다가, 이내 ‘후’하고 연기를 내뱉는 동안 잿빛으로 잦아든다.     


- 그런데 넌 왜 담배를 피우냐? 게다가 여자가.     

라 군의 말에 영애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 여자? 여자가 뭐? 너 옛날에는 여자들도 다 담배 피웠다는 거 알고 있냐?

  너, 교과서에도 나오는 신윤복 알지? 그 사람 그림에도 여자가 담배 피우는 그림도 있고, 시골 우리 할머니도 늘 담배를 피워. 그게 뭐? 왜 담배를 남자만 피우는 거로 생각하냐?

조선 시대 때 애들이 배가 아파도 담배를 피웠었다고. 흥     


영애가 언성을 높이자 차마 라 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라 군도 영애가 말한 사실들은 이것저것 잡스러운 독서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여자가 드러내어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대개 담배를 피우는 여자는 어디서건 ‘술집 여자’로 일반화시켜 생각하는 게 당연했었으니까.

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장죽을 든 여자도 ‘기생’이라는 것을 라 군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영애와 말다툼을 벌일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저 라 군이 영애에게 그런 말을 꺼낸 이유는 별로 깊은 생각도 없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떠도는 여성 흡연에 대한 시선을 무심코 던졌을 뿐이었으니까.   

  

- 아니 뭐….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게 몸에 더 해롭다는 말을 들은 거 같아서…….     


우물쭈물하는 라 군의 말에 영애는 픽, 하고 웃었다.     

너 내 건강 걱정해 주는 거냐? 걱정 말아라. 이 누나가 너보다는 키도 더 크거든?     

영애가 라 군의 약점을 꼬집자 라 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춘기와 성장기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나이대라 그런지 몰라도,

영애는 라 군보다는 훨씬 더 성숙해 보이고 키도 조금 더 컸다.

누가 봐도 교복을 입으면 누나라고 오해를 할 법도 했다.

키가 조금 더 큰 것과,

중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것과는 아무런 인과관계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라 군은 생각했지만

어쩐지 ‘키가 작다’라는 말에 기운이 빠진 상태라,

그냥 입을 다물고 부스럭거리며 이제 다 식은 등유 버너와 냄비를 주섬주섬 챙겨 돌무더기 속에 감췄다.     

- 야, 그 냄비 그대로 두면 어떡해? 씻어야 다시 끓여 먹을 거 아냐?

- 나 보고 그 냄비 집으로 가져가서 씻으라고?

- 아니, 어쨌거나 그대로 다시 쓰진 못하잖아.      


영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물이라는 게 귀한 동네에서 냄비를 어디 가서 씻는다는 건 생각보다 귀찮고 복잡한 일이 틀림없다.     

그럼 뭐 어쩌냐. 이걸 집에 들고 가면 영락없이 아버지에게 들킬 건데. 난 못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라면 냄새 귀신같이 알아챌 거고, 냄비 바닥이 그을 은 것도 물어볼 건데.     

이럴 때 보면 담배를 피워 물고 한껏 어른 흉내를 내곤 있지만, 영애 역시 그저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라 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영애에게

말했다.     


- 내일이 토요일이니까, 오전 수업만 하잖아.

  대부분 체육이고,

 -  아침에 여기 들러서 가져가서 학교 수돗가에서 씻어와야겠다.     

- 오, 머리 좋은데? 역시 반장 출신이야.     


영애가 칭찬 삼아하는 말이었지만,

초등학교 때 두어 번 반장 경험이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라 자괴감에 불과했었던 기억밖에 남지 않은 라 군에겐 오히려 그 말이 놀리는 것으로 들렸다.     


- 어두워진다. 그만 집에 가자.     

시무룩하게 말을 던지며 책가방을 집어 든 라 군은 갑자기 영애가 어깨를 붙잡는 바람에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쭉.

영애의 얼굴이 눈에 꽉 차게 들어와 있는데 그녀의 입술이 라 군의 입술을 물다시피 붙어버렸다.     

억.

소리가 속으로 삼켜진 라 군은 짭짤하고 고소한 라면 수프의 맛과 매캐한 담배의 맛이 범벅된 영애의 입술 맛에 몸이 굳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연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