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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Mar 19. 2024

라면 연대기

19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19     

라 군은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세상이 빙빙 돌거나, 갑자기 환상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동안 라 군이 읽어왔던 수많은 책 어디에고 지금의 감정과 감각을 확실하게 묘사한 글은 없었다.

대개 소설에 묘사된 것들은 키스라는 것이 꽤나 환상적이고,

세상에 다시 없을 경험처럼 어딘가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비밀의 문처럼 되어있었으니까.

하지만 라 군이 지금 느끼는 감각은,

라면의 짭조름한 맛과 담배의 약간 퀴퀴한 냄새.

그러나 생전 처음 느끼는 보드랍고 촉촉한 그런 맛이었다.

순간적으로 영애가 해버린 첫 키스는 조금 과격하게 느껴져서,

생소하며 보드랍고 조금 아픔도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이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는 것도 같았다.

라 군은 이럴 때 소설의 묘사에서는 눈을 서로 감는다고 읽은 기억이 있지만,

느닷없이 덮쳐온 영애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눈 초점도 맞지 않는 상태에서 영애의 살짝 감은 눈과 눈썹이 커다랗게 보여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내 입술을 떼고 물러난 영애가 씩 웃었다.

라 군은 황당함과 묘한 아쉬움과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는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벌겋게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영애가 엷게 웃으며 라 군의 뺨에 손을 가져왔다.     


- 짜식. 뭐 이 정도로 그렇게까지 얼굴이 빨개지냐.

야, 신경 쓰지 마. 오해도 하지 말고. 라면 맛있게 먹어서 고맙다고 누나가 선물 준 거야. 

네가 여자랑 키스 한 번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아서.   

   

순간 라 군은 살짝 오기가 일었다.

라 군은 거칠게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영애의 두 팔을 힘주어 붙들었다.

성난 얼굴의 라 군이 아플 정도로 자신의 두 팔을 움켜쥐자, 영애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당차기가 하늘로 치솟을 정도인 그녀도,

정작 순둥이 이자 동네의 착한 바보로 불리던 라 군의 과격한 몸놀림에 당황한 듯싶었다.

라 군은 팔을 힘껏 당겨 영애를 부둥켜안고,

영애가 자신에게 그러했듯 무작정 자신의 입술을 영애의 입술에 부딪쳐갔다.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입맞춤이라 라기보다는 북한에서 쓰인다는 –확실한 건 모르지만- 일명 ‘주둥이 박치기’라는 단어에 어울릴법한 행동이었다.     

영애의 급작스러운, 장난 같던 입맞춤에 당황하고, 한편으로는 몽롱했던 라면 맛 키스를 두고,

놀리는 듯 말을 하는 그녀에 대한 창피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생긴 반발심이 평소의 라 군 같지 않은 거친 행동으로 이어졌으나 라 군에겐 생전 처음인 행동이라,

격렬한 입술 맞춤은 서로의 앞니를 부딪치는 아픔으로 끝났다.

앞니에 느껴진 통증에 라 군이 얼굴을 영애에게서 떼자마자 그녀는 라 군의 가슴을 밀어붙였다.

씩씩대며 라 군에게 뭔가 한마디를 하려던 영애는,

실은 이 모든 촌극의 시작이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은 듯 라 군을 흘겨보곤 총총한 걸음으로 산에서 내려갔다,     

라 군은 달아오른 얼굴로 살살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연홍빛 철쭉이 막 봉오리를 피워 올리는 계절이었다.

저도 모르게 라 군의 입에서 무심코 독백이 흘렀다.     


아, 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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