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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pr 09. 2024

라면 연대기 20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0     


그날 밤 라 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영애가 그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휘휘 산에서 내려가는 영애의 행동에 라 군은 묘한 아쉬움과 묘한 배신감을 느꼈었다.

낮의 취로사업에 지친 어머니는 이미 코를 골며 잠에 빠진 지 오래고,

아버지는 이따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긴 하지만 자그마한 라 군네의 단칸방은 깊은 잠으로 무겁게 내리 눌려지고 있었다.

대낮에도 빛 한 가닥 들어오지 않는 집은 한밤이 되면 정말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가끔 방범대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한참 넘은 밤은 고요하기만 했다.     

라 군은 키스라는 게 그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양한 책들을 또래보다는 제법 읽어서 나름 많은 잡다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라 군이었지만,

실제의 남녀 간의 관계에서는 거의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라 군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간 읽어본 소설들에서 묘사된 키스란 황홀하고,

머리가 아득해지며 달콤함으로 가득하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는데.

정작 라 군이 맛본 키스는 라면 맛과 담배 맛이 어우러진 그런 것이라,

생전 처음으로 라 군은 책에서 나오는 것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선심을 쓰듯 영애가 라 군에게 내민 입맞춤은 전혀 라 군이 생각하던 그런 맛이 아니었다.

심지어 서로의 앞니가 부딪치는 바람에 아프기까지 했으니까.

정작 라 군이 잠 못 이루며 전전긍긍하는 것은,

격투 같던 첫 키스를 떠올리면 좀 혐오스러운 느낌인데도 뭔가 아랫도리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온다는 거였다.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라 군은 몰래 일어나서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섰다.

가끔 밤중에 변소에 갈 때처럼.

빈약한 양철 문이 소리를 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지만,

그래도 삐걱거리는 경첩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얇은 여름 체육복을 입고 문밖에 나서자 서늘한 초가을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돌아 라 군은 흠칫했다.

야트막한 지붕들이 겹겹으로 보이는 가운데 멀리 그가 태어나 살던 산동네 끄트머리가 시커멓게 솟아올라 보였다.

특별히 담장이 있는 집이 아니라 집 문을 나서면 바로 골목길이었다,

그나마 골목을 앞에 두고 서너 뼘 되는 공터가 있어서 그게 작은 마당 역할을 했는데,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 그 작은 공터에만 달빛이 희게 비추고 있었다.

낮은 지붕의 주변 집들도 라 군네가 세를 사는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라,

전등이 켜진 집은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밤중에 변소를 이용하려면 라 군네의 방 밖을 돌아서 나가는데,

낮에도 어둡고 비좁은 건물 뒤꼍은 잘 보이지 않았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도 그곳을 향할 때면 늘 마치 시각장애인처럼 팔을 앞으로 뻗어 벽을 더듬어가며

은은히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를 따라가곤 했었는데,

무심코 변소를 향하던 라 군은 뭔가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은은한 암모니아 냄새에 섞여 훅 끼쳐 드는 비누 냄새.     

억…. 뭐 뭐야

야, 너 눈 없어?     

소리를 치지도 못하고 소곤거리는 다툼이 있고서야 라 군은 상대방이 영애라는 걸 알았다.

둘 다 이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 뇌리와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통행금지’라는 단어 때문이다.     

뭐니? 너 똥 싸러 가?     

다짜고짜 ‘똥’이라는 단어가 영애의 입에서 나오자 라 군은 말문이 막혔다.     

아, 아냐!

더듬기는. 야, 똥이 뭐 어때서. 똥 안 싸는 사람도 있냐?

그게 아니라….

오줌 싸려고? 싸고 나와 그럼.     

가차 없이 라 군의 생리현상을 간단한 몇 마디로 정의해 버린 영애는 모퉁이를 빠져나와 작은 집 앞 공터에 섰다.

달빛이 영애의 머리카락에 희부옇게 내려앉았다.

라 군은 모퉁이 어둠 속에서 멈칫거리다 변소에 들어갔다.

그나마 라 군이 익숙하던 재래식 변기보다는 조금 낫게,

바닥을 하늘색 타일로 깔고 양변기를 얹은 영애네 변소도 처리방식은 재래식이라 냄새는 여전했다.

그 지독한 암모니아 냄새 가운데에도 은은하니 영애의 비누 냄새가 떠돌아서 라 군은 원지 모를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변소 문을 닫고 나오니 어둠에 익숙해진 탓인지 집 모퉁이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영애가 머리에 월광을 두른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뭘 그리 오래 싸냐? 우리 잠깐 산책할까?

산책? 통행금지인데?

뭐 어때. 멀리 가잔 게 아닌데. 시장 대로 말고 골목에 다니면 괜찮아.     

망설이는 라 군의 손을 잡아끌며 영애는 달빛이 스며든 골목을 나섰다.

얼결에 영애에게 손을 잡힌 라 군은 불현듯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영애는 거침없이 골목을 더듬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새벽 두세 시쯤이 되었을까.

나지막한 시장통 집들은 웅크린 듯 고요하고 사위에는 정적만 감도는데 바람 소리만 이따금 고요의 틈새를 비집으며 지났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정적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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