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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pr 11. 2024

라면 연대기 21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1     

호루라기 소리는 깊은 잠에 빠진 시장 골목을 휘돌아 비명소리처럼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영애와 라 군의 걸음은 얼어붙었고 이어서 다음 행동을 보인건 영애였다.

영애는 득달같이 라 군의 손을 이끌더니 골목 모퉁이 채소가게 좌판 곁에 뭉쳐있는 자루들 뒤로 웅크리고 숨었다.

뭔가 푹신하면서도 물컹한 자루에 몸을 붙여 넣다 보니 젖은 걸레에서 날 것 같은 냄새가 물씬 배어난다.

아마도 저녁 파장 때 남은 시든 푸성귀들을 모아 놓은 곳 같았다.

어두운 가게 처마 아래 무질서하게 쌓인 포대자루에 둘은 포개지듯 겹쳐 붙어 앉아있어서,

등 뒤로 영애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진 라 군은 이 와중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목덜미를 슬쩍 더듬고,

바짝 붙어 웅크린 영애의 봉긋한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라 군의 등뒤를 눌러대는 상태라 그럴 때마다 ‘흡’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라 군은 애써 숨을 참았다.     

먼 데서 누군가 뛰는 소리와 이어지는 호루라기의 비명이 스쳐 지나는 기차소리처럼 들려왔다.

헉헉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분주하게 시장의 대로를 지나쳤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시장판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라 군은 상황에 맞지 않게 과학시간에 배웠던 ‘도플러 효과’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 이제 끝난 거 같지?     


영애의 소곤거림에 라 군은 마치 숨어든 시장의 강아지처럼 포대 위로 고개를 내밀어 멀리 골목 밖으로 보이는 시장대로를 살폈다.

나지막한 판자 건물들과 삐뚜르게 서있는 전신주들의 음영이 기괴한 모습으로 드리워진 골목의 끝,

달빛이 희게 비친 시장 중앙 대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 군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그를 따라 영애도 일어섰다.

둘은 좌우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채소가게 좌판을 벗어났다.

영애는 익숙한 듯 라 군의 손을 잡고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더듬어 어딘가로 향했다.

영애가 라 군을 데리고 간 곳은 시장의 모퉁이 야트막한 오르막에 자리 잡은 성당이었다.

성당은 시장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크고 높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대체로 나지막한 지붕들이 겹겹이 보이는 시장동네에 유일하게 뾰족하니 첨탑이 세워져 있어서 시장 골목 어디에서고 그곳이 보였다.

안 그래도 첨탑 때문에 두드러진 성당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어서 실체 보다 더 높아 보였다.

시장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이정표이자, 방향을 얼추 짐작하는데 필요한 건물이었다.

비록 성당 자체가 궁핍한 삶을 치열하게 연명해 가는 시장사람들 영혼의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못 헸었지만.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있는 성당 건물은 길쭉한 창문들에 달빛이 비쳐 제법 환해 보이는데,

영애가 라 군의 손을 이끌고 간 곳은 성당 입구에 서있는 성모마리아 석고상의 뒤편 그늘이었다.

여느 작은 성당들이 그렇듯 석고상은 작고 볼품은 없었지만,

당시에 어떤 조각상이라는 것은 학교 미술시간에 본 데생용 석고상이 유일하던 시장통 아이들에게는 실물크기의 석고상은 처음엔 경이롭고, 나중에는 낙서판으로 변하긴 했었다.

그래도 작은 암굴 같은 형태 속에 성모마리아가 두 손을 모은 형태로 새겨져 있어서 그 뒤로 돌아가면 제법 아담한 그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애는 어둠이 촘촘히 유치장 창살처럼 내려앉은 성모상 뒤 모퉁이에서 뭔가를 부스럭대며 꺼내 들었다.

마른 담배 냄새가 났다.     

탁.

소리를 내며 영애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 군은 순간 당황하여 주변을 휘휘 들러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그래도 그곳에서는 시장통의 낮은 지붕들과 그 사이를 가로세로 가로지른 좁은 골목들이 훤히 보였다.

달빛에 음영이 깊게 드리워지긴 했지만 그 소로들은 시장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와 연결되어,

그곳에서라면 시장 동네의 거의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성당에 올라와본 라 군은 불안한 눈빛으로 달빛이 가득 깔린 시장골목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는 사이 영애는 제법 능숙한 자세로 담배연기를 피워 올린다.  

   

- 야, 걱정 마. 여긴 동상 뒤편이라 불빛도 안 보이고, 방범들도 여긴 잘 안 와.

- 너 여기 자주와?

- 어, 가끔     

- 통행금지 시간에?


음영 속에서 담뱃불을 빨아들이자 순간 담배 끝 불빛에 영애의 조소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 너 바보냐? 대체 우리가 왜 밤에 통행을 못하지? 세상에 그런 나라는 거의 없어.

너는 공부도 제법 한다는 애가 어쩌면 그리 고지식하고 틀에 갇혀있니?

무엇 때문에 밤에 나오면 안 된다는 거지? 밤에 돌아다니는 술 마신 사람들을 잡아다 유치장에 재웠다 다시 풀어주는 건 또 뭐고?


문득 라 군은 낮에 산등성이나 시장 골목과 비좁은 집에서 변소에 갈 때마다 보았던 영애와, 

원래 나와서는 안 되는 ‘야간 통행금지’ 시간에 어둑한 성당의 모퉁이에서 담배를 찾아 피우는 영애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 마주하는 그녀는 그냥 장난기 많고 귀여운, 조금은 소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시각.

통행금지 위반자를 색출하러 다니는 방범대원들의 사각지대에서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가끔 담뱃불을 빨아댈 때 잠시간 환히 빛이 나며 보이는 영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그녀가 유혹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소설에 등장하던 다소 헤퍼 보이는 성인여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세든 집주인딸 이기도 한 그녀에게 어딘지 모르게 ‘연상’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라 군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저 소년에 불과하다면 영애에게서는 처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저도 모르게 침이 목젖을 타고 식도로 넘어갔고, 그 소리가 어두운 성당 앞, 성모상 뒤편 어둠 속을 울렸다.

라 군은 캄캄함 속에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를 제발 영애가 못 들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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