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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pr 12. 2024

라면 연대기 22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2     


달빛이 밝게 내려앉은 시장통 골목은 어딘지 모르게 반짝이는데,

그늘이 진 가게들의 그림자는 또 어딘가 모르게 음산하게도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걸음걸이로 앞서서 콧노래를 흥얼대며 걷는 영애의 뒷모습을 보면서,

라 군은 묘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새벽 달빛이 주는 느낌처럼 기묘하게 상반된 감정이 라 군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어딘가 애틋한 그리움 같은 간지러운 감정과,

자신을 이끌어 쥐락펴락하는 것 같은 감정들이 그것이었다.     

영애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자신이 나서 자라온 터전이 철거를 당한 이후.

라 군으로서는 많이 위축된 그런 상황이었다.


라 군에게 집이라는 것이 주는 의미는 단순히 그저 자라난 그런 곳이 아니다.

그 집이 사라지고 한 줌 시멘트 블록 무더기로 변한 순간부터,

그동안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부터 구축된 라 군의 세계는 소멸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라 군이 겪은 충격은 의기소침과 같이 간단히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라 군이 학교 기관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배우기 시작했던,

정의, 윤리, 성실, 자유 같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희망차게 보이던 단어들이 

사실은 가식적이며 지극히 평등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조금 부유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노동이 힘겨울 거라는 것을 모르는 라 군이 아니지만,

자기가 학교에 다니며 노력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더 나아질 거라 낙관하던 라 군이다.

하지만 공권력에 의해 일방적인 통보와 일방적인 소멸을 경험한 라 군에게,

교탁 앞에서 평등과 자유와 미래를 부르짖는 선생님들의 교육이란 어딘지 모르게 맥이 빠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깜빡 잊고 라면 수프를 절반 밖에 넣지 않은 라면처럼 밍밍하고 설득력 없는 맛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게 영애였지만,

자신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던 라 군에게 처음 영애의 존재는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무기력하게 영애가 이끄는 대로 평소 하지 않던 일탈들을 하게 된 이유.

깊게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라 군에게 그건 작은 파랑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또 라 군의 사춘기와 교묘하게 얽히는 바람에 그 작은 파랑이 점점 파고 높은 물결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라 군의 마음이 온전히 영애에게 집중이 될 수 없었던 것 또한,

더 바닥으로 내려갈 것이 없는 라 군의 마음 탓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밤,

달빛이 이른 서리처럼 낮은 지붕들을 하얗게 덮고 있는 가운데,

비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영애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라 군의 마음이 어쩐지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성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등 뒤로 느꼈던 영애의 따스한 체온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라 군은 그리 멀지 않은 시장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만약 자신에게 첫사랑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면 그건 아마 영애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정작 영애는 대담스러운 행동들을 하면서도,

라 군에게 확실한 친근감을 따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라 군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다.     

짧은 거리에 비해 생각은 무척이나 길었다.

라 군이 정신을 차리고 멈춰보니 어느새 집 앞의 조그만 공터에 서 있었다.

라 군의 앞에서는 영애가 달빛에 반짝이는 눈으로 라 군을 바라보고 있고.     


- 너 뭐 해? 걸으면서 꿈꾸니?

- 어? 아니 뭐. 무슨….

- 뭘 그렇게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는 거니? 너 이상해.    

 

영애의 말에 라 군은 어둠 속에서도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뭔가 은밀한 속마음을 들킨 느낌이랄까.

라 군은 쿵쾅대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영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늘 눈길을 돌리거나 내리깔던 라 군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자,

영애도 의외였는 듯 특유의 빙글거리는 미소를 그치고 라 군을 바라보았다.     


- 너,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다짜고짜 묻는 라 군의 말이 떨리는 음색으로 나오자, 영애는 원래도 동그란 눈이 더 크고 동그랗게 변했다.

잠시 집 앞 공터에 침묵이 흘렀다.     


-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무슨 말이야?

- 나,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왜 내게 이렇게 살갑게 구는 거지? 

    

저도 모르게 딱딱한 말투로 더듬대는 자신이 더 놀라운 라 군이었다.     


- 뭘 어떻게 생각해? 너 그냥 좋은 친구잖아. 친구,

- 치…. 친구끼리 키스…. 그런 거 해도 되나?     


라 군이 되묻자 영애의 얼굴이 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한참 라 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이 애가 무슨 생각인가를 탐색이라도 하는 듯이.    

 

- 너, 그래서 싫었어? 키스?     

대놓고 영애가 묻자 라 군은 당황하여 손까지 저어가며 즉시 부인했다.     

- 아니!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라 군의 즉각적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던 영애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 그럼 너 나하고 키스하는 게 좋았구나? 그러면 지금, 내게 키스해도 좋아.

- 뭐?     


다시 또 당황스러워진 라 군의 머릿속은 더듬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순간,

영애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라 군이 영애를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을 채우던 더듬거림과, 

침침한 어둠 속에서도 달아오르던 얼굴이 마치 찬물에 씻기워지듯 사라졌다.

라 군은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촉 안 되는 가로등에 얼핏 비치는 영애 얼굴에 희미한 윤곽이,

자기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 군은 말없이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문득 뒤에서 따라오는 영애가 희미하게 킬킬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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