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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pr 25. 2024

라면 연대기 23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3     

라 군은 영애가 집 문을 열고 도둑고양이처럼 들어갈 때까지도 공터에 멍청히 서 있었다.

어깨를 물들인 달빛이 서서히 기울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라 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애의 도발적인 말에 라 군 또한 오기가 생겨 무작정 영애의 입술에 얼굴을 내밀었었다.

다만, 그것이 방향을 못 찾아 더듬댔다는 결과로 나타났지만.

영애의 손이 라 군의 두 뺨을 감싸 안으며 라 군 입술을 정확히 찾았고,

순간 라 군은 저도 모르게 영애의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는 자세가 되었다.


그 상태가 되어서야 라 군은 보통 고전소설 들에서 나오는 키스에 대한 묘사들이 얼마나 불친절하고 문어체 식 묘사인지를 깨달았다.

라 군이 궁금해하던, 

입과 입이 만나면 코가 서로 뭉개지는 거 아닌가 하던 고민은 아주 쉽게 풀렸다.

그리고 눈을 꼭 감는다, 는 표현들이 많았는데 눈을 감고 어떻게 상대방의 입술을 찾는가? 하는 것도.     

조금 전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 길인데도 영애의 숨결에서는 사과 향이 났다.

타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호흡하는 경험 또한 처음이라,

처음에 라 군은 숨을 멈춰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이내, 그 모든 게 글과는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라 군의 뇌리에서는 은근한 배신감이 스쳐 지났다.

그의 집이 사라지게 되며 느꼈던 것 같은 ‘ 책’에 대한 배신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을 읽고 사람을 읽는 방법을 책으로 익혀오던 라 군에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그가 구축해 온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것이었다.     


라 군은 반쯤 삭아 너덜대는 양철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뭔가 붕 떠 있는 듯한 이 기분으론 날을 세워도 그만이지 싶지만,

그렇다고 이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있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깰까 봐 조심스럽게 양철문을 연 라 군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완만한 동작으로 부엌에 들어섰다.

반쯤 열린 양철문 사이로 달빛이 유리 조각들처럼 부엌 바닥에 들어왔다.

순간 라 군은 부모님의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잠시 멈칫했다.

코를 고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것은 부모님이 깨어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라 군네 부엌과 방을 잇는 문짝이라야 부실한 합판 두 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채광이 안 좋은 구조상 그 문짝에는 간유리가 끼어있어서 

오늘 정도로 달빛이 밝으면 아마 방안도 훤하게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용했다.     

그때 라 군은 어쩐지 방 안에서 옅은 신음 소리 같은 것을 들은 것 같았다.

절반 이상 어둠에 휩싸인 부엌에서 라 군은 불현듯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원래도 늘 쏘는 듯한 냄새들이 나던 부엌은 그날따라 유난스럽게 느껴져,

라 군은 부엌과 방을 잇는 문을 조심스레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곳까지 달빛이 들어오진 못해서 라 군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방 반대편 벽에 붙은 작은 창이 희미하게 보일 뿐,

방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라 군이 부엌의 5촉 전등을 켰다.

낮은 촉수의 전등이지만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라 군에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어머니는 어찌 된 일인지 창문에 가까운 벽에 반쯤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아버지는 엎어져 고개를 돌린 상태였는데 입가에 흰 거품이 부글거리는 게 보였다.

라 군은 순간 얼어붙었다.

잘은 몰라도 그게 연탄가스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란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뭘 어찌해야 하나.

라 군은 방으로 뛰어들어 어머니를 흔들었지만, 어머니는 그저 앓는 소리만 낼뿐이라,

라 군은 젖 먹던 힘을 끌어내어 어머니를 끌고 부엌 입구로 다가갔다.

부엌의 양철문을 활짝 열자 차고 서늘한 새벽공기가 왈칵 밀려든다.

어머니를 부엌 문턱에 걸치곤 다시 라 군은 방안의 아버지를 끌어내려고 들어갔는데,

아직 덜 여문 라 군의 힘에 아버지의 몸은 너무나 무거웠다.

도저히 안 되자 라 군은 벽에 있는 작은 창문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한 후,

주인집, 영애네로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잠시 망설이던 라 군은 영애네 문을 쾅쾅 두드렸다.     


- 도와주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새벽녘, 고요하던 시장통 집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뭐라 뭐라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주인아저씨, 영애의 아빠였다.

영애의 아빠는 잔뜩 찌푸린 미간을 달빛에 세우면서 등 뒤로 알전구의 빛을 받아 거무튀튀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 뭐야? 이 새벽에 무슨 일이냐?     


잠시 라 군을 껌뻑이며 바라보던 영애의 아버지는 그 소동의 당사자가 셋방의 소년인 것을 알아채곤 조금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 저희 방에 연탄가스가 들었나 봐요! 아버지 어머니가 꿈쩍 하지를 못해요! 아저씨 도와주세요….    

 

라 군의 말을 들을 아저씨가 후다닥 라 군의 집 문으로 뛰어갔다.

그사이에 조금 전 들어갔던 영애와 영애의 어머니가 달려 나오고,

라 군도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갔다.

아저씨와 라 군이 끙끙대며 축 늘어진 아버지를 부엌 밖으로 끌어냈다.

집 앞 낮은 공터는 갑자기 여러 사람이 부산스러운데,

그 위로 차가운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고 있었다.

부엌문을 통해 스며 나오는 낮은 촉수의 전등 빛이 공터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기괴하게 드리우고 먼 데 어디서 호루라기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 어여 동치미 떠와! 어여!

영애 아버지가 애먼 영애의 어머니에게 고함지른 소리.

그리고.

라 군은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문득 자신이 영애의 아버지에게 '저희 집'이 아닌 ' 저희 방'이라고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음을 깨달았다.

묘하게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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