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emento Mori

Memento Mori 2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by 능선오름

2.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기자씨는 평소보다 더 늦은 밤이 되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 이유는 고주망태의 대명사였던 천하의 난봉꾼이라 불리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그런 이유로도 늘, 한약방의 몇 안 되는 직원들이 이따금 벌이곤 하던 회식자리에서도 술을 마신적이 없었다.

남정네들이란 노소를 막론하고, 여자에게 그것도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젊은 여자라면 미추를 떠나 일단 술을 강권하는 게 세상의 분위기였던 시절이다.

하지만 ’빙녀‘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로 냉정한 그녀가 남정네들의 분위기에 떠밀려 술을 마신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굳이 회식자리를 참여하던 이유는 간단했다.

평소 거의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악착같이 빈곤한 식단을 그녀가 유지하던 이유는 돈을 모으기 위한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상시 못 먹던 고기류를 먹을 수 있는 회식자리는 그녀에게 영양보충과 더불어 한 끼니 식사에 들어갈 돈을 아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다지 친구도 변변치 않던 그녀였지만 어쨌거나 아주 간혹 동창들에게서 연락이 와도 나가지 않는 이유 또한 불필요한 돈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랬던 그녀가 사실 이웃이라곤해도 뭔가 자신과는 정 반대의 느낌을 가진 진애 씨와 술을 한 잔 마시게 된 건 기자씨의 마음 한구석에 요즈음 밀려온,

생애 첫 연애 비슷한 감정을 대체 누구에게 상의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일종의 기회였다,

어차피 서로의 신상을 잘 알지도 못하기에 어떤 언짢은 감정이 생긴다 해도 그냥 무시하고 살면 그만일 터였다.

그마저도 불편하면 좀 거추장스럽지만 이사를 하면 그만이라는 속셈도 있었다.

그런저런 이유와 합리화를 엮어서 술의 힘을 빌어 낯선 옆방의 진애 씨에게 자신이 처한 연애 상담을 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술기운은 아니었다.

기자씨가 그토록 싫어하던 고주망태 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인지 그녀는 술을 마셔도 그다지 반응은 없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상태.

그런 그녀가 자신의 현재 연애도 뭣도 아닌 남녀관계의 사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진애 씨에게 묻자 진애 씨는 장난스럽던 얼굴표정이 바뀌며 제법 진지하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그다지 현란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은 기자씨의 연애 상담이 끝나자 자못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거였다.


- 동생. 동생이라고 할게? 너 보니까 남자하고 연애 한번 안 했다는 건 알겠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봐.

요즘 세상에 얼굴에 분칠 하나 않고 매일 질끈 머리를 묶고 입술에 립스틱 하나 안 바르는 여자를 남자들이 과연 좋아할까? 내 보기에 그 상대 남자는 아마도 그런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라 생각했을 거 같아.

연애상대보다는 아주 착실한 현모양처 감으로 말이야.

그래서 아마 접근했을 거고. 그렇지만 연애를 그냥 하는 거 아니고 너도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고 있다면 너도 좀 적극적일 필요가 있거든.


진애 씨의 말을 들으며 너무나 노골적으로 자신의 현상태를 지적하는 내용에 조금 민망하고 조금은 화도 났지만 기자씨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역시 본 대로, 진애라는 여자는 뭔가 남자들의 속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경험도 풍부하고,

어쩌면 남자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미 도가 튼 사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 뭐, 나는 말하자면 하는 일이 보험 판매원이야.

사람들은 보험을 판다는 게 매일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찾아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그런 일로 생각하지만,

나는 좀 달라.

난 개인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큰 회사들의 보험을 영업하거든.

그러자면 대체로 사장급이나 아니어도 좀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들과 영업을 할 수밖에 없지. 말하자면 그들과 친해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슬쩍슬쩍 들어주면 다 넘어오게 된다 이 말이야.


기자씨는 그런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게 돈이 될만한 일이 되는지도 전혀 몰랐었다.

기자씨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읽었는지 진애 싸는 픽 하고 웃으며 다시 소주잔을 스스로 채워 입에 털어 넣었다.


- 그러니까 어차피 그 회사를 대상으로 보험을 들으라곤 하지만 그 금액이 꽤 크거든.

잘만 성사되면 이따위 판잣집쯤 몇 채 살만큼 수당이 나온다 이거야.

물론, 그게 공짜로 되는 건 아니야.

원하지 않는 술자리도 함께 해줘야 하고 온갖 중늙은이들 수발을 다 들어줘야 하지.

말하자면 큰 건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들과 잠도 한 번쯤 자주면 무조건 성사되게 되어있지.

우리 직종 모두가 그런 건 물론 아니지. 난 내 나름의 '영업' 방법을 가진 거고.


기자씨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몰랐지만,

여자가 이미 가정이 있는 중년남성들에게 몸을 팔아서 영업을 하다니.

기자씨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도덕에서는 그건 아버지와 붙어먹은 그 여자와 거의 다를 게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을 당시에는 ’ 갈보‘라고 부르곤 했다. 정확한 어원은 모르지만 말이다.

이따금 부엌에서 어머니가 홀로 눈물을 찍으며 눌은밥을,

그것도 부뚜막 위에 앉아 머리에는 일할 때 쓰던 흰보 자기를 그대로 두른 채 울먹거리며 중얼중얼하던 단어였다.

똥갈보. 양갈보 같은 년.

비록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골 부농의 딸이라 늘 음전하고 조금은 젊잖은 말만 하시던 어머니의 입에서 밖에서 왈패처럼 지내는 시장판 아줌마들이나 깔깔대며 하던 욕지거리가 나왔을 때 기자씨는 정말 놀랐었다.

그런데 이 옆집에 사는 진애라는 여자는 너무도 태연하게,

그런 행위들이 마치 가볍게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더해서 그게 자신의 연애담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불쾌한 표정이 깃든 기자씨의 얼굴을 흘깃 본 진애 씨는 다시 픽 하고 웃었다.

- 너 정말 숙맥이구나. 결국 그 남자가 너와 결혼을 원하는 것 같다.

그걸 전제로 소위 연애를 거는 거 아냐. 그리고 너도 그 정도 남자라면 남편감으로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런 거 아냐? 그냥 가만있으면 고향의 꼴 보기 싫은 부모님이 거의 강제로 시집을 보내버릴 거 같고 말이야. 아냐?


진애 씨의 말을 듣고 보니 사실이 그렇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뭘 어쩌란 말인가?

멍하게 반쯤 입을 벌린 기자씨를 보며 진애 씨가 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좀 약빠르게 굴라고. 네가 그 남자와 술 한잔 하다가 어찌어찌 잠을 자.

그러다가 애라도 생기면 더 좋겠지.

일단 유부남도 아니고 총각 아니야?

게다가 나름 집안도 뼈대 있는 가문인데, 설마 너를 모른 채 하겠느냐고.

앞뒤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 일단 쌀이 익어 밥이 되었는데 어쩌겠냐, 이판사판 결혼을 하면 끝!

그거라 이거지.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어찌어찌 어수선하게 술자리를 끝내고 진애 씨가 방에 들어간 한참 뒤까지도 기자씨는 충격적이고,

그러나 전혀 몰랐고 알 수도 없던 남녀의 세상에 대해서 드는 수많은 생각에 한참을 툇마루에 앉아 이미 어둑해진 산동네의 어슴푸레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어.

내가 죽자 돈을 모으는 이유도 그거 아닌가.

넌더리 나는 본가를 완벽하게 벗어나고, 나 스스로 독립해서 내 힘으로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 아니야.

공부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그랬고, 삶에 대한 치열한 생존투쟁도 따지고 보면 잘 먹고 잘살자는 마음 그것이었지.

물론 이렇게 악착같이 살다 보면 언젠가는 돈도 모으고 잘 살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더구나 시대는 이미 스물 중반만 넘어가도 노처녀라고 업신여기던 시기였다.

일반인들의 시선으로는 아마 진애 씨 같은 여자들은 노처녀를 넘어서서 구제불능의 꽃뱀,

혹은 갈보라 불리는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가끔 고향에서 한약방으로 전화가 올 때마다,

기자씨는 맞선을 보러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호통을 매번 듣다가 끊어버리곤 했었다.

아버지의 발음은 늘 술에 취해 반쯤은 횡설수설이었고,

그럼에도 내용은 대본이라도 읽는 양 한결같았다.


- 야. 이 년아. 계집애를 그 정도로 교육을 시켰으면 되었고 한의사가 되었으면 이제 시집을 가야 할 거 아녀? 네 언니들 다 시집가서 아들 잘 낳고 사는데 넌 뭐냐? 정말 동네 창피해서 원.

잔말 말고 이번 주말에 꼭 내려와서 읍내 양조장 아들하고 선 뵈어야!

그 집이 얼마나 알짜인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알지. 그 양조장 집이 읍내에서 꽤나 떵떵거리는 부자라는 거.

그리고 역시나 당시 돈 좀 쥐었다는 남정네들이 다 그랬듯 첩살이 여자가 세 명이나 된다는 것도.

그 아들놈이라는 것도 서울서 어찌어찌 이름도 모를 대학을 나와서 구박을 받긴 했지만,

그 아버지의 상재를 물려받았는지 여기저기 읍장이나 면장 같은 사람들과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양조장뿐 아니라 정미소를 비롯해 사업들을 제법 크게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거기 더해서 읍내 반반한 처자치고 그 놈팡이를 거치지 않은 여자가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런 중에 사달이 벌어져 멀쩡한 처자 하나가 읍입구의 당나무에 목을 매달았다는 소문까지 알고 있는 기자씨였다.


비록 멀리 서울에 올라와 나름의 독립적이며 전문적인 일을 하고 있는 그녀였었지만,

아직은 그렇게 치를 떠는 부모님으로부터의 자유는 미미하던 상태였다.

그런데 얼굴도 준수하고,

게다가 나름 명문 집안의 아들이며 좋은 대학을 나와 앞으로 그 한약상의 사장이 될지도 모르는 헌칠한 남자와 맞선을 본다는 것.

그건 어쩌면 기자씨가 안고 있는 현재의 모든 골치 아프고도 전혀 내키지 않는 수많은 상황들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최고의 ’ 패‘ 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그 상대방인 남자가 진애 씨의 말대로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기자씨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뭇 처녀들에 비한다면 자신이 그래도 덜 힘든 삶을 살아온 사실은 인정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막 벗어난 시절에 태어났었고,

전 국민 대다수가 궁핍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버지가 물려받은 땅덩이 덕분에 배를 곯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아들로 태어났었다면 아마도 귀동이를 향했었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애정은 자신을 향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원해서 딸로 태어난 건 아니었으니 기자씨는 억울했다.

누군가, 곁에서 궁핍에 시달리던 친구들의 눈에는 그래도 굶지 않고 학교도 다녔던 기자씨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마음일 게고 기자씨 스스로는 만약 좀 굶더라도 자신을 아껴주는 부모에게 태어나는 것과,

별로 관심도 없고 하고많은 불필요한 언니들과 애정을 독식하는 아들 사이에 낀 자신의 상태를 비교하여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첫 번째 길을 선택했을 것이었다.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

기자씨에게 형제란, 극복하고 다퉈 이겨나가야 할 경쟁상대였을 뿐이었다.

그건 이미 야생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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