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 함순 작
북유럽. 그중에서도 스칸디아비아 반도 출신 작가의
글을 읽은 기억이 많지 않다. 아주 드물다.
스웨덴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시리즈 정도 될까.
그 소설은 장르가 스릴러물 이어서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다만 생전 처음 보는 도시 낯선 도시이름과 발음도 몹시 껄끄러운 등장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북유럽이 장말 머나먼 곳이며 이국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솔직히 이국적이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동경 같음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질적이라고 느꼈다.
주임공과 주변인들이 이끌어가는 내러티브는 도저히 공감되지 않고 흔히 복지천국이라 선입견을 가질 정도의 지식밖에 없던 나에게는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읽게 된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에 이르러서는 그 혼란함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노벨상이라는 또 다른 선입견이 없었다면 정주행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의 철저한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에 대한 공감이 없고 지역에 대한 무지함이 많다 보니 대체 왜 주인공은 그렇게 가난하고 그토록 처절하게 가난한데 굳이 글 쓰는 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 설명되진 않는다.
화자는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 충만하지만 상황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흔히 짐작되는 노숙인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크로네‘라는 노르웨이의 화폐 단위가 어느 정도 무게일지 전혀 감이 없어서 더 혼란스럽다.
주인공이 묘사하는 주변 사회구조는 꽤 정교하고 꽤 정확히 돌아가는 시스템인데 정작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에겐 소스라칠 정도로 가혹하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사유하고 사투하는 주인공.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늘 잘 다듬어지고 문법이 아름답게 조합된 문장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범인이라면 그 시간에 날품을 팔거나 지인에게 사정을 구해서라도 그 굶주림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들은 정교하고 치밀해서 독자에게 상황의 절박함과 주인공의 처절한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전달되게 하는 필력이 있다.
문득 천재 이상 시인의 수필이 떠오르기도 하고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나 헤세의 몽상은 늘 부르주아적으로 먹고사는 것과는 무관한 인간관계에 관한 단상들이었다면 크누트 함순의 글은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아니 그 보다 더 밑바닥 무산자의 치열한 하루살이에 대한 소고 다.
독자는 화자가 말하는 숲 속의 노숙이라던가 보잘것없는 물품을 전당 잡혀 한 끼니를 해결하는 이야기들에 불편한 동반을 할 수밖에 선택권이 없다.
사회구조가 잘 짜여 자주 순찰 경관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주인공이 공원에서 잠들지 못하도록 지적하거나 주인공의 방향 없는 방황을 주시할 뿐 그가 왜 그런 상태일지 관심이 없다. 빈곤이 생활화된 사회라서 그런지 대다수 사람들도 주인공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품속에 몽당연필과 종이를 마치 은밀한 비수처럼 품고 다니며 그것으로 성령처럼 떠오른 글귀들을 미친 듯 적어가곤 하는데 그 묘사에 대한 내용은 주인공이 글쓰기와 창작에 대하여 정말 성스러운 행위처럼 느껴지게 한다.
화자의 처지가 비롯 며칠째 굶주림과 잠들 방 하나 없는 노숙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임에도 늘 거룩한 한 문장에 몰두하는 묘사가 그러하다.
화자는 그 시기에도 어느 정도 잘 작동하고 있던 노숙자를 위한 프로그램조차 어느 정도의 허영심과 어느 정도는 헛된 체면치레 때문에 무료 식권조차 받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정도가 다를 뿐 우리 자신들도 곤경에 처했을 때 타인으로부터 가련하게 여겨지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여 주어질 수 있을 사회복지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런 면은 인종의 차이가 아닌 개개인 성향의 차이 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 글은 소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소위 전업작가 로서의 삶이 얼마나 냉엄한 현실인지를 낱낱이 알려주는 느낌을 받았다.
고 이외수 작가의 작가 지원 시절 일화도 떠올랐다.
일 년 내 씻은 적도 없고, 불기 한점 없는 움막 같은 곳에서 오직 칼날을 벼르듯 원고지만을 노려보며 지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결국 진정성을 독자에게 교감시킬 수 있는 글이란 그처럼 옛날옛적 폭포 앞에서 득음의 경지를 노렸던 케케묵은 판소리 지원자처럼 해야 한다는 걸까.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굶주림만큼 원초적이며 절대적이고 필사적인 게 있을까.
살아가고 사고하는데 가장 근본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지성이 높고 도덕적인 존재라고 해도 고작 몇 끼의 굶주림에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단지 끼니때를 놓치고 이어지는 산행 정도에서 벌어지는 굶주림에 관한 유치 찬란한 다툼도 많이 보았다.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굶주린 사람은 비참 그 자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지적인 경계도 없다.
화자는 혹독한 굶주림과 추위와 가만속에서 오히려 온전히 자기 자신의 마음속 세계로 침잠한다.
그의 담담한 궁핍에 대한 소고는 때로 너무나 불편하고 때때로 혐오가 치밀 정도라서 길지 않은 글임에도 꽤 오랜 시간 나눠 읽었다.
때로는 출장 전철 안에서. 때로 이륙을 기다리는 여객기 인에서. 혹은 호텔 조식 뷔페를 깨작거리면서. 어찌 보면 가장 부르주아적 일상을 보내며 그의 글울 읽을 때는 교감은 전혀 없다.
그러다 다 늦은 저녁도 아닌 밤중에 텅 빈 편의점 간이의지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는 상황에서는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듯 가볍고 헐거운 존재다.
신사스러움과 노무자스러움의 경계는 아주 약간의 옷차림새와 상황과 주머니 시정에 따라 쉽게 바뀐다 고 화자는 말하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크리스천적이고 순하고 도덕적인 바탄을 가진 화자도 굶주림에 지쳐 아주 사소한 비양심을 저지르기도 하고 그 와중에 짧고 거친 연애를 한다는 것은 뭔가 아퀴가 안 맞는 사건이긴 하다.
적어도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어렵다.
몇 달은 씻지도 못하고 누가 봐도 노숙인에 가까운 체취를 풍기고 있을 사람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는 건 이해가 어려운 일인데 어쩌면 그 시대엔 누구나가 그런 정도의 행색을 감수했었을지는 모른다. 책이 끝나갈 때까지도 주인공은 처절한 하루하루의 굶주림과 다투다가 러시아 배에 취직을 함으로써 글을 마친다.
어쩌면 저자인 크누트 함순의 미국행 체험을 풀어쓴 것일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담백한 글이고 또 다른 방면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광의의 의미를 함축한 글 같기도 해서 사실 아리송한 후기다.
그러나 노벨상이라는 후광은 대단해서 이 글에 뭔가 심오한 것이 숨겨져 있지 않은지 곱씹게 되는 효과는 있다.
게다가 정규교육이란 전혀 받지 못했던 작가가 오직 문학에 대함 열정으로 이런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존경스럽다.
하지만 참 어려운 책이다.
감정이입이 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정신병적 행위로 느껴지기도 하고 전반적으로는 이렇듯 담담하고 담백하게 고생담을 기술한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읽음에 집중할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