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말을 거네 48
노출콘크리트....(제주 특집)
안도 다다오를 대변하는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노출콘크리트 건축이다.
모두는 아니어도 안도의 건축을 기억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출콘크리트= 안도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안도에 앞서 우리나라에도 노출콘크리트 건물의 거장들은 있었다.
노출콘크리트에 대하여 일반 대중이 오해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노출콘크리트는 마감이 따로 없으니 저렴한 건축이라고.
어쩌면 과거, 인건비가 정말 싸고 오직 손기술에 의존하던 근대 초에는 그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인건비가 재료비를 압도하는 시기라 당대의 기술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속되게 말하기를 과거에는 ‘목수’로 불리려면 최소 5년 이상이 걸렸는데,
요즘엔 누구라도 현장에 와서 망치 들고 오가면 ‘목수’라는 자조적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만큼 콘크리트 기술이 발달했고 모듈화가 이루어졌다는 긍정적 면이 있고,
반면에 거푸집(콘크리트를 부어 굳히는 형틀)을 현장에서 정교하게 제작하는 기술은 이제는 굉장히 고난도의 소수정예만 가능하게 변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 노출콘크리트 건물들은 잊혔다.
그러나 강북지역에는 일반적 기억에서 사라졌을 뿐, 여전히 건재한다.
심지어 철거 직전에 어떤 공무원이 발견하여 간신히 철거를 면한 걸작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노출콘크리트를 일반적으로 알린 건축가는, 건축을 공부하는 대개의 학부생이 최초로 접하는 ‘김수근’ 선생이다.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최초로 일반에 크게 알려진 건축사사무소 ‘공간’의 창립자이자 과거 군부 권력이 애정했던 건축가로도 불린다.
안도에 대한 건축인들의 평가와 비슷하게, 김수근 건축가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으로 나뉜다.
긍정 파들은 한국 현대건축사의 이정표이자 최고의 건축가라고도 하고,
부정 파들은 결국 일본 건축을 유사하게 베낀 친일성향의 건축가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왜 그런지는 아래의 건축 유산들을 보면 어느 정도 긍정도 부정도 가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현대 노출콘크리트의 진정한 대가는 김중업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 결국,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김중업은 1971년 11월, 갑작스럽게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거주하게 된다. ”
위키백과에 나오는 이 한 구절만 봐도 그렇다.
아래에 나온 그분의 작업결과들이 대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상진 선생의 작품이 앞서 말한 철거될 뻔했던 아래의 건물이다.
우리나라의 노출콘크리트 건물들은 안도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안도 보다 선대의 건물들이다.
현대에 이르러 과거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놀랍게 공원으로 바꾸었던 예가 있으니,
선유도공원(2002년, 정영선+조성룡)이다.
이런 것들이 재조명되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래의 사진은 일본 근대건축의 대가라고 알려진 단게 겐조의 대표적 건물이다. 위의 사진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