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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06. 2024

두 바퀴 위의 단상

오 주여!

두 바퀴 위의 단상


오 주여!


지난달.

지나친, 그리고 방법적으로도 옳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적인 포교를 하는 일부 교인들 때문에 학부모들과 상의 끝에 ‘국민신문고’라는 곳에 건의를 했다. 건의 라 부르고 고발이라 이해하긴 하지만.

글을 올린 지 다음 날부터 쉴 새 없이 카톡이 울린다.

귀하의 민원이 서울교육청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귀하의 민원이 경찰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귀하의 민원 처리기한이 연장되었습니다, 귀하의 민원에 대해 경찰청에서 답변하였습니다.  총 2주에 걸쳐 나온 답변은 ‘ 순찰을 강화해 보았으나 그런 포교 현장을 보지 못했고, 해당 기관에 경고조치 하였고, 앞으로도 순찰을 강화하겠고. 이상. ‘

뭐 이랬다.

그리고 다음날도 역시나 할머니들이 나오더라…..

그 중심에는 날도 땡볕인데 정장을 꽉꽉 갖춰 입은 – 아마도 신학교 학생, 혹은 전도사? – 다소 젊은 남성이 있고, 할머니들은 우두머리가 있어서 여기! 저기! 길 건너! 등 각자 전투배치? 를 지휘하는 할머니가 있고, 모두가 옆구리에는 탄입대… 가 아닌 가방을 끼고 아이들이 하굣길에 지나칠 때마다 과자봉지를 꺼내주며 유인물을 준다.

몇 학년이냐, 교회에서 재미있는 거 많이 하니까 꼭 와라….. 등등

부모와 함께 하교하는 아이들까지 예외 없이 붙들리기도 하고, 부모가 쏘아보거나 말거나 그냥 부모는 아이의 그림자로 치부할 뿐이고.

개중에 태권도복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는 과자봉지를 받자 너무나 신이 나서, 뒤에 따라오는 친구들을 몰아서 ‘ 야, 저기서 과자 줘! 어서 가봐!’ 의도치 않은 앞잡이? 가 되었고.

그렇게 저학년 하굣길에는 포교인들이 골목마다 배치되었다.

마치 숙련된 UDT/ SEAL 팀 중 에이스팀을 보는 것 같달까.

그리고 마침 시간이 있어서 지켜보니 고학년 하굣길은 텅텅 비었다.

그렇겠지. 요즘 고학년들이 여간내기여야 말이지.

경고 따위는 먹히지도 않는구만.

그렇게 며칠 지나니 학부모 모임톡에 새로운 것이 또 등장했다.

한 부모의 말에 의하면 학교에서 횡단보도를 지나는 길에 누군가가 등장해서 아이에게 먹거릴 주기에 뭐냐고 항의하자 뭐 교인인데 어떠냐고 반문을 하더란다.

일단 아이에게 먹을 걸 주면서 유인하지 말라고. 그런데 어디 교회냐고. 물었더니 응? 그간 말썽이 많던 교회가 아니네? 어디지?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음…..

대체 뭔가 싶어서 톡에서 언급된 교회를 네비에 찍고 퇴근길에 들러보았다.

어라.

이게 뭐지.

태초에 말썽을 부리던 그 교회와 같은 계파가 아닌가.

그 위치도 참 절묘하게 첫째 교회가 학교 정면에서 우측 코너 끝에 있다면,

둘째 교회는 정반대인 좌측코너 횡단보도 너머에 있는 거다.

이거 뭐 좌청룡 우백호도 아니고.

보니, 학교 후문이 안전상 이유로 통행금지가 되어버려서 아이들은 좋든 싫든 두 교회에서 펼친 천라지망? 을 벗어날 수가 없다.

톡에 보니 학부형과 포교인 사이 언쟁이 심해져 112에 신고를 했는데, 출동 경찰이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으니 ‘경고’를 했다고 한다.

경고. 나도 할 수 있을 텐데.

새로 등장한 두 번째 교회는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앞 인도의 절반을 천막으로 덮어서 (나머지 절반은 차도와 전봇대로 가려져 불가피하게 교회 천막 밑으로 지나야 한다) 간이 책상과 의자를 놓고 지나치는 아이들을 족족 잡아 앉혀서 과자봉지를 주며 이리저리 명단을 적고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등 떠밀어 교회 안으로 보낸다.

음…. 보통 특수작전에서는 이런 역할을 유인조라고 칭한다.

빗속에서 그냥 지나치는 행인 1 같은 복색으로 휘적휘적 다니면서 아이들이 보이면 유인조에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보내는 중년아재는 보통은 정찰조 라고 하고.

보이진 않지만 그 교회 안으로 아이들이 들어가면 아마 체포조와 심문조가 있겠지.


나도 왕년에 성서를 읽어본 적은 있다.

그냥 재미있어서 재미로.

그런데,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포교/선교는 본인의 신앙심으로 진지하고도 신실한 마음으로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정말 내 선입견을 다 덮고 보아도 할머니들의 얼굴을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행복하긴커녕 전철역 앞에서 전단지 나눠주는 할머니들의 표정과 똑같았다!

이건 대체 뭔가.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걸까.

이렇게 공격적 포교활동이 부모와 아이들에게 훨씬 나쁜 선입견을 주리라는 걸 모르나.

차라리 하굣길의 장애우들, 그리고 지쳐 보이는 장애우의 부모들을 도와주고 친절하게 거들어 주는 것이 실제 의미의 집사 (디아코니아 = 섬김) 아닐까.

아니면 혹시, 중세기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가톨릭 사제들처럼 포교 신도를 채우면 천국행 티켓이라도 주는 건가.


주여.

주의 이름을 걸고 세속적 장삿속으로 주 이름을 팔아 행사하는 저들 기만자들을 벌 하소서.

이건 공권력을 무시하는 행위이자 국민의 세금으로 움직이는 공무원들을 쓸데없는 곳으로 세비 낭비를 하게끔 만드는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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