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건축이 말을 거네 55
유튜브와 방송으로 인지도가 꽤 있는 모 고고학자가 모 건축교수를 ‘저격’ 했다는 표제의 온라인 뉴스를 보았다.
요컨대, 건축교수이자 유명방송인이기도 한 모 교수의 저작물 내용 중 고대에 대한 기술내용이 사실과 다르고,
인류학적 논점도 틀리다는 내용으로 이해하였다.
짚고 넘어가자면 대개 건축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박학다식 博學多識 하지 않다.
박학다식 薄學多識 한 편이다.
전문적 이라기에는 다소 얕은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본인이 평소 업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선 진정한 박학다식 일수 있다.
건축이라는 업종 자체가 워낙 방대한 분야에서 일부분을 각자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 건축에 대한 모든 것.
이를테면 고대 건축사, 근현대 건축사, 이런 분류로 나눠 ‘역사’ 혹은 ‘고고학’과 연계를 하자면 한 분야만으로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거기에 ‘공학’만 따져도 재료, 구조처럼 세분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그중 한 분야에만 해도 정통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디자인’까지 들어가면 그야말로 전문화가 어렵기 짝이 없다.
건축법까지 들어가면 더 점입가경일 테고.
물론 학문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전문가라 할 수 있지만, 그 외의 분야들은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이 많은 편이다.
‘건축행위’ 자체가 수많은 전문가들을 규합하여 필요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이다 보니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다.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모든 악기들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기까지는 ‘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변명이다.
그러나, 책을 저술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그냥 에세이 같은 것이라면야 상관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전문성에 기반하여 저술을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보통의 논문이 그렇지 않은가?
항상 논문 작성에서는 어떤 인용문을 어디서 인용했는지 출처를 명기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 인용한 논문 혹은 저서의 근본이 어딘지를 찾다 보면 이상한 경우도 많다.
아주 오래전, 현재처럼 정보의 바다가 존재하지도 않던 오래전에 본인이 찾을 수 있던 근거에서 ‘인용’을 하던 시절에는 그 정보가 실존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인용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방사능연대측정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더욱더 그랬었다.
하물며, 본인의 전문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더욱더 민감한 문제다.
일반적으로 ‘박사’라고 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박사학위는 일종의 운전면허증이다.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바로 운전을 잘할 수 없고, 모든 차종을 능숙하게 다룰 수 없는 건 기정사실이다.
석사라는 학위는 자기 전공 분야에서 좀 더 폭을 좁혀 특정 부분에 대해 공부를 조금더 하는 것이고, 박사라는 학위는 석사 때 좁혀진 특정분야를 더 깊고 더 심도 있게 공부하는 과정일 뿐 그것 자체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이 택한 주제에 대해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일종의 도로연수용 운전면허를 주는 셈이다.
그래서 더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비전문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학문이나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올라갈수록 전공과 자신의 주된 연구 분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고, 건축은 더더욱 그렇다.
예컨대 건축구조, 그중에서도 철골구조를 심도 있게 연구한, 하고 있는 교수님에게 뜬금없이 목조 건축물에 대한 자문을 여쭌다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그건 내가 답변할 만큼 아는 게 없다고.
당연하다. 철골구조 한 분야만 파고들어도 평생이 모자라는 깊이가 있으니까.
하물며 방향을 아예 떠난 인문, 지리, 고고학, 사회학 등등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이라야 거의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일 수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관심사가 있어서 자기 전공 이상으로 특정 분야에 대하여 공부를 했다면 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走馬看山 식의 지식만 있다면 전문가라고 부를 수는 없다.
건축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아닌, 전반적으로 설계/시공/감리/공무 등 업무를 동시에 진행하는 종합적 업무 관리자는 더더욱 그렇다.
여러 분야를 조합하여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보니 대강은 알지만, 그리고 경험치라는 게 있지만, 개별 분야를 깊게 들어가면 막힌다.
당연하다.
나열한 어느 한 분야만 해도 그 곁가지로 나눠지는 방향은 굉장히 많으니까.
그 낱낱의 방향을 모두 정통하다? 그건 거의 사기에 가깝다.
과거에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만한 대기업 계열의 건설사에서 30년 근무를 한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의 근무기간 동안 전국에서 벌어지는 댐공사마다 선배의 족적이 깃들어있다고 할 정도로 그 분야의 ‘전문가’였는데, 선배가 은퇴를 할 즈음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 난 평생 토목. 건설회사에서 근무했지만 집을 지을 줄 몰라. 기사시절부터 임원이 될 때까지 댐에 콘크리트를 붓는 과정에만 참여했거든. 어느 현장이고 콘크리트 타설 과정만 참여했다고. 그래서 댐공사 때 필요한 콘크리트 부분을 빼곤 난 건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남들이 뜬금없이 건물 짓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면 참 난감하더라고.”
이게 현실이고 한계다.
하물며, 건축이라는 방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맡아서 현직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그 배경이 되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 전반을 잘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본인이 주마간산 격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 있게 기술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 세상이 되어 정보를 획득하기는 쉬워졌지만, 그 정보가 사실인지 정론인지를 파악하기에는 또 큰 어려움이 있다.
그것의 출처가 일반적으로 ‘신뢰할만한’ 기관이나 연구소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에 큰 소동이 벌어졌던 ‘라돈 매트리스’만 해도 그렇다.
그게 이슈 거리가 되기 전까지는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 누구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낸 적이 없었다.
뉴스화가 되고 공론화가 되고 나니 여기저기 방송에 ‘전문가’들이 나타나서 일반인들의 무지함을 탓하는 형국이 되었었다.
과거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서 ‘라돈’을 첨가한 화장품, 치약, 온갖 물품들이 사회전반적으로 유통되던 시기도 있었다.
‘라돈’의 유해함을 깨닫기 전의 일이다.
박사 과정이라는 것이, 공부하는 과정은 어렵고 험난하지만 생각보다 깊이는 얕다.
10년 이상을 공부하여 깨달은 것은 나는 건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자괴감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의구심이다.
여기저기서 배우고 들었던 내용들을 모두 의심하고, 이것이 실제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하는 강박증 같은 것이 생겼었다.
그게 가장 큰 성과이자, 일종의 콤플렉스 이기도 하다.
모 건축가가 그 모든 것을 과연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을까.
그분도 자신이 기술한 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를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모 학자도 자신이 전문지식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 부족한 점은 따로 짚어서 모 건축가에게 수정을 요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대학원에서 박사논문공개발표에 참석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이른바 critique이라 부르는, 대체로 참가 교수님들이 발표자의 논문에 대해 비평을 하는 과정이다.
학위논문을 발표하는 연구생 입장에서는 몹시도 긴장되고 사전 준비로 밤잠을 설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의 3~5년 정도의 과정을 거치며 최종 성과물이 되는 기로이니 어찌 긴장을 않겠는가.
그런데, 다수는 아니어도 이따금 “ 이런 주제가 논문거리가 되나? ”라고 지적하는 교수님들이 있었다.
발표장에는 당연히 발표자의 지도교수님도 계신 상태이고.
보통 학내 교수진 서열에서 좀 낮다고 인지되는 분들이 지도교수님 일 경우에는 그게 더 심했다.
‘논문거리’라고 지칭하는 순간부터 발표자에겐 오랜 시간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내는 것이 크리틱이긴 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교수님들이 사전에 배포된 발표자료의 내용을 숙지 않는 상태도 있다.
바쁜 학과 일정 속에서 모든 연구생들의 발표논문을 일일이 다 들여다보고 고민하진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첫출발부터 ‘다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좀 그렇다.
물론 앞서 기술한 모 건축가의 저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공공에게, 그것도 돈을 내고 사서 읽는 책이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사실과 근거를 가지고 저작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저자가 일부러 어떤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려고 했거나가 아닌 부정확한 혹은 근거가 미흡한 사실을 기술했을 때는 ‘교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늘 퇴고 따윈 없이 맘 가는 대로 글을 쓰고 올리는 내 처지에선 꽤 뜨끔한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