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 위의 단상

지하철 바퀴 위의 단상

by 능선오름

마치 자카르타의 한 여름 아침 같은 오늘.

주먹을 허공에 대고 휘저어 꾸욱 힘껏 누르면 물기가 주룩 흘러내릴 것처럼 습도가 진한 날.

이런 날 덜 붐비는 시간에 전철에 오른다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다.

전철 밖의 사우나 같은 공기를 뒤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한 객차에 들어서면 깊게 한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게 된다.

마치 폐부속에 가득하던 습기를 내뿜기라도 하는 것처럼.


덜 붐비는, 출근길이 아닌 시간이어서 인지 몇몇 자리들이 보여 좌석에 앉았다.

어지간해서는 텅텅 빈 전철이어도 잘 앉지 않는 편이긴 한데,

습식 사우나 같은 전철역사에서 꽤 지쳤던 모양이다.

건너편 좌석 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보인다.

어두컴컴한 지하 동굴을 지나쳐가는 지하철 창문에 지친, 데스마스크 같은 표정의 내가 보인다.


사람들은 앉거나 서거나 한결 같이 조금씩 목덜미에 땀이 맺혔고,

모두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한결 같이 들여다보고 있다.

건너편 좌석에 좀 나이 든 어르신이 앉아있어서 달리 할 일이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한 회색의 페도라.

턱 밑까지 잠근 스카이 블루 드레스 셔츠.

뭔지 모를 문양의 펜던트가 달린 볼로타이 (왜 어르신들은 또 한결같이 볼로타이를 쓰는 걸까. 날도 더운데)

진한 청색 블레이저.

버클이 번쩍이는 인조가죽 벨트.

딱 달라붙는 청바지.

하얀색 나이키 러닝화.

그리고 옆 좌석에는 인조가죽 메신저 백이 놓였고.

다리는 역시나 45도 각도의 벌림 다리.


이맛살을 찌푸린 상태로 낡은 인조가죽으로 덮인 휴대전화에 뭔가를 열심히 오른손 검지 하나만으로 타이핑 중 이시다.

공교롭게도 슬슬 좌석이 채워지는데 어르신의 왼쪽, 그러니까 어르신의 메신저 백이 놓여있는 자리만 비워져 있다.

출입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아까의 나처럼 습도에 절여진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리저리 살펴보다 어르신 옆으로 다가선다.

그리곤 어르신과 어르신 옆에 놓인 가방을 좌우로 살펴보다 이내 체념한 듯 자리를 피해서 사라졌다.

고의적인 건 아닐 테고.

주변의 상황을 살필 정도로 배려심 있어 보이는 관상도 아닌 어르신인지라 그지 한참을 그렇게 혼자 두 칸을 차지하고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계셨다.

그러다 한 승강장에서 어떤 분이 타더니 거침없이 어르신 옆, 가방이 놓인 자리에 하체를 내려놓으시니 어르신이 허둥지둥 가방을 치운다.

전혀 인식을 않았던 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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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처한 좌석을 차지하신 분의 차림새를 보았다.


선캡을 쓴 흰 파마머리.

약간 색상이 들어간 금테 안경.

골프복 상의. 등산복 하의. 그리고 등산가방.

신발은... 큐빅이 반짝이는 로퍼.

그분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리를 잡자 두 좌석을 태연히 차지하고 가던 어르신도 자세를 단정히 잡는다.

역시.

꿩 잡는 게 매라는 속담이 있듯이 할아버지를 타격하는 건 역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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