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 위의 단상

祭忘父歌 제망부가

by 능선오름

祭忘父歌 제망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잃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퇴근길 경사진 얼음판에서 넘어지셔서, 그것도 불운하게 대퇴골이 골절되셔서 1년 남짓 추레한 투병 끝에 반 절름 걸이가 되신 이후부터 어쩌면 아버지는 이전의 삶을 잃고 간신히 이어가신 듯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위암 말기 판정.

당시에는 국민의료보험도 없었거니와 한 집안에 암환자가 생기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삼 년이 채 못 되는 투병 중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셨다.

아버지 사후에 아버지 유품, 유품이랄 것도 없이 병중에 아버지 곁에 늘 놓였던 손바닥 만한 수첩에 쓰인 자잘한 글귀들을 읽고서야 나는 불효자로서의 자괴감을 느끼며 홀로 펑펑 울었었다.


선친은 거인 이셨다.

정확한 측정 키는 없었지만 190은 훌쩍 넘는 키에 당시 80킬로그램짜리 쌀가마 (쌀포대가 아니다. 진짜 볏짚으로 만든 쌀가마)를 한 손으로 어깨 위에 척 올리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그런 거인이었다.

시절에 맞지 않게 태어난 거인에게 소인들의 세상은 불편함과 차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버지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평생 몸에 맞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상점에서 사는 셔츠는 당시 제일 큰 사이즈의 옷이라도 늘 소매가 짤뚱하게 두 뼘 이상 모자랐고, 어깨에 맞지도 않아 툭하면 터져 찢길 정도였다.

제일 힘든 것은 지금은 다르지만 그때는 시중에 나도는 신발이란 게 290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용산 미군부대 근처에 나오는 미군복 중고상점에서 산 미군 워커의 기다란 목을 잘라낸 어정쩡한 군화를 신고 다니셨다.

당시 사람들의 키가 평균 170 정도를 넘기는 게 훤칠한 수준이었으니, 아버지의 얼굴은 늘 군중 속에서 우뚝 홀로 솟아 있었다.

게다가 무표정에 가까운 사납게 생긴 얼굴.


남들은 모른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에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늘 스스로 바느질을 하시고,

갱지들을 모아 꼼꼼하게 묶어서 거기에 그림과 글씨를 써서 만들어 내신 그림책으로 내가 한글을 일찌감치 뗐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방학마다 나오는 온갖 과제물들 중 나비채집 표본 만들기, 창작 공작물 만들기, 집 모형 만들기 같은 숙제들은 늘 그 아버지의 솥뚜껑 만한 손으로 만들어져서 자랑스럽게 개학날 학교에 가져가면 항상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고 교실 뒤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거대한 몸과 안 어울리는 섬세함이 아버지의 본체였음을 나는 그때는 깨닫지 못하였다.


병중의 아버지께 내가 해야 하는 가장 큰 효도는 내가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하는 것을 몰랐다.

그저 한창 사춘기 때 아버지께서 병으로 누워 계시니 늘 밖을 나돌며 어정대는 것밖에 보여드린 게 없다.

그나마 내가 한 이 년간 지속적으로 한 일이라곤,

아버지가 위암이니 혹여 물이라도 약수를 드시면 어떨까 하는 모지란 생각 속에,

새벽 네시에 일어나 남산 타워 바로 아래에 새벽 시간 한정으로 문을 열어주는 약수터로 향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옥수동 꼭대기에서 약수동을 거쳐 장충동을 한 바퀴 돌아 남대문 쪽에서 올라오는 도로 곁에 눈에 띄지 않는 철문이 있었는데, 그곳이 약수터로 오르는 길이었다.

남산 아래 산자락이나 중간 산책로쯤에도 약수터는 있었지만,

아무 근거 없이 산꼭대기에서 특별한 시간에만 여는 약수를 떠다 드리면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자기 확신 같은 거였다.

그때는 몸이라도 그렇게 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가로등도 없는 삼백 계단을 오르다 보면 부엉이가 웅웅 거리는 것도 보였지만 무서움은 전혀 없었다.


무서움이란 것을 느끼기에는 이미 고등학교의 나이에 세상 쓴맛을 다 봐버린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말기’라는 의사의 지엄한 선언. 그리고 딱 봐도 ‘가난해’ 보이는 환자에 대한 쌀쌀맞은 대응에 익숙해져 병원 치료도 그만두었는데도 우리는 자가에서 전세, 전세에서 월세, 월세도 단칸방으로 점점 쪼그라드는 집안에 보였었기에 당시의 나는 ‘앙팡 테리블’이 아닌 이미 절망의 세상을 봐버린 십 대였다.


아버지는 사흘 동안 세숫대야에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

그래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부른 동네 의원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약국에서 파는 ‘혈장주사액’ 이라도 사 오라고 해서 슬리퍼 신는 것도 잊고 뛰어가 몇 달치 월세분의 주사약을 사가지고 돌아왔지만... 이미 아버지는 의식을 잃으신 상태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혈색은 희지도 않고 누렇게 변해 있었다.


당시는 겨울이었고, 이어진 옹색한 3일장을 단칸방에서 치르고, 묘지조차 종교단체 도움을 받아 포천의 종교단체 묘원에 가서 흰 눈과 얼음바닥을 열어 아버지를 묻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내게는 아무런 힘도 선택권도 없었다.

그나마, 믿지도 않는 종교를 절뚝거리며 몇 달 동안 다니신 아버지의 장래 누울 자리에 대한 준비 아닌 준비가 서글펐던 기억이다.

아버지의 묘지는 무료로 받은 것이라 초라했고, 무료라곤 하나 매년 관리비를 내야 했는데 그마저도 수년간 방치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묘지석조차 올릴 돈이 없어서 조그맣게 번호가 붙은 말뚝을 보고 아버지 산소를 찾았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그나마 이름 석자를 새긴 묘지석을 올리게 된 것은 내가 소위로 임관한 이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몇 달 모은 월급을 들고 외출 신청을 해서 최전방에서 포천으로 내려와 묘지관리소에 가서 밀린 관리비와 묘지석 비용을 주고받는 그 과정은 참으로 먹먹하였다.

당시 묘지 관리인은 말했었다.


‘ 고인 께서도 아드님이 이렇게 장교가 되어 묘지석을 다 세울 정도로 크셨으니 흐뭇하실 거라고’

글쎄, 그런 영혼의 세계를 믿기에는 너무나 험악한 최전방의 경험이 있어서였던지 나는 희미하게 조소했었던 것 같다.

그저 내 마음속 부채를 덜어낸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서 세월이 흐르고 흘러 몇 년 전.

나는 국방부, 정훈부와 치열한 서류 다툼 끝에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최종 안착 지를 찾을 수 있었다.

이장을 거쳐 아버지의 유골은 지금 여주 현충원에 계신다.

마치 아파트처럼 반듯반듯하게 화강석으로 높게 쌓인 납골당은 살아생전 아버지의 키 이상 높은 곳에 올려져 있어서 참배를 하려면 바퀴가 달린 사다리차를 밀어서 그 위로 올라가야 볼 수 있다.

대리석 문을 열면 유리창 안에 아버지의 젊디 젊은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아이가 올려놓은 인조꽃송이도 보이고.


아버지.

참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살아생전 아버지의 키 높이 맞는 자리를 찾았습니다.

전쟁 때 그 고생을 하시고 잃은 손가락의 대가로 아버지를 나라에서 챙겨준다고 합니다.

못난 자식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 어린 아들은 어떡하나 ’라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써 놓으셨었지요.

아버지.

그 아들이 이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되었습니다.

믿지도 않고, 존재 자체를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정말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영혼이 있는 그런 거라면,

정말 저 세상이 있는 거라면.

아버지.

이제 정말 편히 쉬세요.

살아서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셨었으니, 이제는 편히 쉬세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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