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책의 사회학 적 고찰
주책 : 일정하게 자리 잡힌 생각, 또는 줏대 없이 구는 짓을 말한다. 한자어 주착(主着)에서 유래한 단어지만 현재는 주책만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주책없다, 주책이다, 주책맞다 등으로 활용한다.
'나이 먹고 주책'이란 표현도 있는데 이는 나이가 들고 나서도 철없거나 경솔한 짓을 할 때, 또는 나잇대에 맞지 않거나 나잇값을 못하는 짓을 할 때 사용한다. - 나무위키 -
젊을 때 하는 짓을 주책맞다고 하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대체로 오십 대 이상이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이는 문장이 아닌가 한다.
소위 ‘나잇값’ 이란 무엇인가.
“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치한 언행을 하는 사람. 이 문서에서는 고령자가 너무 지나치게 유치한 행동을 하는 것 이외에도 나이가 상당함에도 실제로 격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의 경우도 서술하고 있다. 남들에게 따돌림당하기 쉬운 유형이다.”- 나무위키 -
이러저러한 객관적 서술들을 통합해서 이해하자면, 마흔~오십 세는 넘는 사람이 유치하거나 격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나이와 무관하게 ‘젊게’ 산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주책맞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경계가 참 모호하다.
내 생각에는, 대체로 젊은이들의 삶에 억지로 끼어들지 않고 알아서 젊게 사는 노인들은
비교적 우호적 반응을 보이지만, 젊은이들의 시공간에서 눈에 띄는 노인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일종의 연령별로 공유하는 물건, 시간, 행동, 공간 등에 다른 연령대가 들어갔을 때 그것을 ‘주책’으로 가늠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적으로 사회의 기능 중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그룹에 속할 때는 덜한 반면에,
이제 은퇴하거나 실제 생산활동에서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이 생산적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멀쩡? 거리는 모습이 싫은 모양새 아닐까.
뜬금없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으로 유명한 화두가 생각난다.
“ 저 세상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아니야,
자 보렴, 젊은것들은 짝을 지어 껴안고 있고
숲 속의 새들은 짝을 찾느라 연신 지저귀고 있잖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저 죽어가는 것들을 봐!
산란하기 위해 수 천리 물길을 찾아온 연어는
물살 거센 폭포를 거슬러 오르고,
바다에는 고등어가 짝을 짓느라 득실대고 있잖아?
저 모든 것들, 사람이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이나 모두
그저 배고 태어나고 죽는 저 일에 몰두해 있지 않니?
그저 본능 아니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을 뿐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지 않니?
그러니 이곳은 나와 같은 늙은이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저들의 세상이 아니겠어?
그럼 난 뭐야? 늙어빠진 나는 도대체 뭐냐고?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막대기 위에
낡고 헤어진 외투를 걸쳐놓았을 뿐이지,
혹 영혼에서 울려 나와 박수를 치고 노래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언젠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갈 이 낡은 외투의 조각조각들을 위해
더 높고 힘찬 영혼의 노래를 불러댈 수 있다면 혹 모를까
그냥 늙은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
그런데 영혼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자신만의 장려한 기념비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런 영혼의 노래를 가르쳐줄 노래교습소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난 먼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을 찾아온 것이라네
아, 성자들이시여, 황금으로 새겨진 모자이크 속에
신의 성스런 불 속에 영원히 서 계시는 당신 성자들이시여,
성스런 불로부터 나오셔서 허공으로부터 감돌며 내게 내려오시라,
오셔서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주시라.
욕망에 찌들고 병든 내 심장,
한 번 태어났으니 언젠가는 죽어야 할
유한한 생명에 얽매어 스스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나의 심장을
말끔히 태워주시오, 그리하여 나 역시도
벽속에 장식된 저 영원한 예술품 속으로 넣어주시오
나고 죽는 제 세상으로부터 한 번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 다시는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로 된 그 어떤 몸뚱이 같은 것은
취하지 않으리라,
먼 옛날 희랍의 金細工(금세공) 장이가
졸음에 겨운 황제를 깨우기 위해
금으로 入絲(입사)하고 琺瑯(법랑)하여
만들었다는 한 마리 황금의 새가 되어 지저귀리라,
아니면 황금의 가지 위에 앉아
비잔티움의 여러 귀족들과 귀부인들에게
지나간 일들과 눈앞을 지나가는 현재, 그리고 또 다가올 미래를
노래로서 들려주리라.” 예이츠 시.
노인 = 주책 이란 등식은 뭔가 불가역적이다.
사람은 모두 늙고, 대개의 사회적 형태에서 ‘힘이 없는’ 노인은 주책맞은 존재로 읽힌다.
여기서 힘이란 돈, 명예 그 모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지도자들도 대개 ‘노인’ 축에 속하는 자연연령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노인’으로 대변되지는 않는다.
힘과 권력이 있는 한 그들은 노인의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판단을 할 때 자연적인 연령은 공평하게 적용하진 않는다.
힘과 권력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지위는 연령과 무관하게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니까.
즉, 힘과 권력을 가지고 젊은이처럼 행동하는 노인은 ‘젋게 사는 것’이고,
힘도 권력도 없는데 젊은이들의 문화를 따라가면 ‘주책맞은 것’ 이 된다면 억지일까.
사람이란 세월의 힘 앞에서는 속절없어서, 나 또한 젊은 시절에는 그런 시각이 있었다.
애써 젊은 날의 흔적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노인들이 안쓰러웠고,
그들의 주책맞은 사회활동이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그럴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왜 그들이 그랬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과 늙음은 어떻게 표상되는가.
대체로 사회적 지위, 그리고 육체적인 낡음, 가정을 이뤘을 때 가정 내 젊음을 대변하는 자식의 성장, 사회 기반의 중심에 있던 위치에서 변방으로 슬슬 물려 나는 시기들.
이런 것들이 인간의 늙음을 주관적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기표가 된다.
시인들조차 에이츠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들어서 안다.
그런데, 내가 그즈음 나이가 되고 보니 무슨 의미 일지는 어슴프레 헤아려진다.
인간의 속절없는 늙음에 대한 슬픔, 그리고 영원에 가깝게 변치 않는 것들에 대한 동경.
한때 본인의 모습이었을 젊음에 대한 질시 같은 것들이 아닐까.
세상에서 본인이 나서서 세상을 유지할 이유와 능력이 다 사라져 버린 노인에게 세상은 이제 자신의 설자리도 없고 물러날 유폐의 그늘만 가득한 그런 곳으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예이츠 또한 1928년 60대에 이 시를 썼다고 하니까.
시인에게 있어서 그 시절 그 나이를 초월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이십 대는 이해하고 공감할지언정, 좀 더 나이 든 시인들은 스물세 살이 세상을 뭘 안다고... 식으로 까대기 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까.
당시 서정주 시인이 예이츠의 시를 읽었다면 절대 공감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십 대에 불과했으므로.
조금 더 시기가 지나 소설 ‘은교’를 보면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을 부분이 많을 것이다.
젊디 젊은 은교가 노작가에게 감정을 품을 이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노작가가 재벌이라도 되면 모를까 – 내가 세속적인가 – 대체 늙고 흰머리에 자글자글 주름진 노인을 무엇 때문에 젊은 은교가 호감을 품는다는 말인가.
그건 노인들의 ‘환상’이자 늙은 노작가의 환상일 뿐이다.
늙은 작가를 젊은 여성이 ‘노인’이 아닌 ‘남성’으로도 호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
불가능하며 기이한 조합이다.
나 역시 남자지만, 나이가 젊을 때도 그렇고 나이가 들었을 때도 주변의 ‘노인 남자’들은 일관되게 주책맞았다.
그건 꼭 노인이 아니어도 인간 수컷 특유의 이상한 자신감 같다.
대체로 많은 남자들은 자신이 그래도 꽤 ‘괜찮다’라고 생각한다.
절대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본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하다.
어떤 50대가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20대 여학생에게 고백을 했는데 거부했다고 폭행을 저질러... 같은 뉴스 헤드라인은 잊을만하면 나온다.
대체 저 아재는 어떻게 본인(주제에) 젊은 여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지녔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거지?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남녀 불문하고.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되면 (남성) 자신의 현재 객관적 상태와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거라는 기이한 착각을 가지고 있다.
주책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여성은 일정 연령에 폐경기를 거치며 생물학적인 본능이 어느 정도 제어되는 시기를 거치지만,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자동제어될 시기가 없으므로 일평생 미개한 부분이 존재한다.
본능이 살아있으면 상대방의 생각 따위 안중 없이 본인 위주로 뭐든 ‘가능하다’라는 주책맞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배울 만큼 배웠고 충분히 객관적으로 이성적이라고 지목할만한 인물들에게서도 직접 목격한 바가 있으니 내 경험칙 상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우다.
직업적이거나 사회관계에서 여러 가지로 엮인 ‘남자 노인’ 들에게 젊은 여성이 호감 비슷한 경우를 보이는 경우는 대체로 존경, 혹은 연민, 혹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노인은 전혀 성적인 의도가 없는 코드들을 엉뚱하게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 같은 것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인류 역사를 돌아보아도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설마, 자기 아버지 보다 나이가 많은 노배우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새파란 신입 여배우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거라고 착각하는 노인이 있다면 그건 정말 걱정스러운 주책맞음이다.
모든 남녀의 성이란 각기 제 나이 또래에 맞아야 어울리고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그걸 벗어나서 인생이 저물녘인데도 아직 스스로 젊다고 착각하고 살면 그게 바로 주책맞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