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게 대체 뭔데
고대에서 분리된 아가페 적 혹은 에로스 적 사랑의 구분법.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에 대한 화두는 대개 두 번째에 해당한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곤 ‘당연’ 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배경도 다르고 성장과정도 다르며 성별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으로 엮인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면서도 원초적인 감정이다.
엇비슷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면서 애정을 키우는 경우는 경험 공유에 의한 자연스러운 친밀감 이겠으나,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은 신비로운 변칙이다.
그 과정에는 수백 수천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그 많은 경우의 수 와 우연과 필연 등이 겹치고 얽혀서 하나의 사랑을 만들어내는 셈이니 신기하다.
시 에도 있지 않은가.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정말로 그 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내’가 ‘너’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운명론 적이다.
그리고 그 운명론은 대개 내분비 계통 호르몬의 변화에 의해 몇 년 이상 지속되지 않음이 또 다른 슬픈 운명이다.
학자들은 말한다.
만약 사람이 사랑에 빠진 그 당시의 내분비 계통 변화가 그대로 존속이 된다면 아마 조만간에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그만큼 ‘ 온 힘을 다하여’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분출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 변화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식어가는 과정 또한 그러하다.
언제 그랬던가 식으로 차갑게 돌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칠 것 같이 사랑에 빠져드는 기제도, 그랬던 사랑이 생판 모를 타인에 대한 감정처럼 무뎌지는 기제도 아직 우리는 알고 있지 못하다.
어슴프레 짐작은 하지만, 짐작한다고 예방백신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깊던 사랑에서 갑자기 화들짝 놀라듯 깨어나는가.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하다.
서사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불가역의 사랑조차 호르몬 분비의 변화에 의한 사랑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일반론적 설이다.
대체로 만족도라는 것은 해당하는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목표로 하는 만족도가 있고, 그 목적물이 ‘내 것’이 되고 나면 한동안 몰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미 내 것이 된 것에 대하여는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과 서로 교감이 이루어졌다 생각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만족도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루어지지 않는 목표라면 그 기대치가 더 오래가지 않을까.
그건 그렇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잘 이뤄지지 않은 목표에 더 집착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표라는 것이 실제로 자신에게 잘 맞는지 자신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는 부차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
즉, 자신과 잘 안 맞는 부분이 있더라도 자신이 잘 맞추면 –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 다 잘 될 거라는 터무니없을 낙관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랑은 상대방의 외모나 눈앞에 보이는 행동과 나와 어우러지는 것들로 이뤄지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모든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어느 정도 위장하는 방어기제가 있고, 연애할 때 보이는 모습은 진정한 ‘나’는 아니다.
그것이 함께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을 때는 아주 사소한 ‘다름’에서도 다툼이 일어나는 촉매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대감’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대감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덜 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상대가 내게 옴으로서 뭔가 내 만족감이 더해지기를 원하는 게 본질적인 사랑의 정체다.
즉 이기적인 마음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스개로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 정말로 상대를 사랑해? 그렇다면 네가 물러나야지, 그게 상대방을 위한 최선인걸. “
이렇게 까지 시니컬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대개 이기적이다.
상대의 입장보다 내 입장과 내 바람이 더 크게 차지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고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해 보면 대체로 ’나‘라는 사람은 상대방을 정말 확고하게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건이 늘 모자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내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고 싶어 하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의 생체리듬은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강하고 어떤 사람은 밤에 강하다.
그 생체리듬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 동안 직업적, 생활적으로 체득이 된 것이다.
그 리듬조차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려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기서 서로 ’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거나 다툼으로 변질이 된다.
사랑을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는 일종의 ’ 협의‘가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꿀단지는 밑창에 구멍이 있다는 전제 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모두 단지에 꿀을 계속 붓는 행위가 필요하고 단지에서 꿀을 꺼내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역설이다.
달디 단 꿀이 없다면 사랑의 꿀단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꿀단지 옆을 흐르는 달콤한 파편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계속 부어 넣기만 하고 듬뿍 한 그릇 마실 수 없는 꿀.
그게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의 민낯을 대하면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두 사람이 혈연으로 맺어진 아가페적 사랑이 아닌 이상,
변질이 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에로스로 시작한 사랑이 아가페로 변한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인데.
그래서 결혼 생활을 오래 유지하면 나중에는 사랑은 간데없이 전우애 같은 혹은 연민 같은 감정들만 남는 게 아닐까.
현실적인 일상 속에서 사랑을 누리려면 어려운 일 아닐까.
누구나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하나 된 가정을 만들고,
그 가정 안에서 사랑을 완성하려고 애쓰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꿀단지에서 꿀맛만 보려고 하면 당연히 꿀단지는 곧 비워진다.
변질되지 않는 사랑은 없다.
그러나 형태가 달라질 뿐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거의 모든 인류가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생물학적인 이유가 아닌 이유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체계가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인정하면 다 괜찮아진다.
이십여 년을 함께 먹고 자고 하다가 갑자기 연애초기처럼 가슴이 두근거릴 일은 없다.
결혼 초기에는 인내하고 참아주던 일들을 이제 와서 참아주고 싶지는 않아 진다.
그런 것을 서로 이해하며, 변질이 아닌 진화임을 깨닫고 서로 인정하면 된다.
전우애 연민 같은 마음이 아니라, 함께 보낸 세월에 따라 사랑의 모습도 변하면 된다.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을 열렬한 연애 시절만 기본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함을 탓할게 아니라,
이제 세월에 익은 만큼 거기에 맞게 서로의 모자란 점, 다른 점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된다.
이삼십 년을 서로 다른 환경 다른 생각으로 살아오다 하나로 뭉쳐,
서로의 다름에 익숙해지고 인정하는 기간이 이십여 년이면 이제 서로를 받아들이면 된다.
왜 너는 나와 같지 못하냐고 탓을 할 게 아니라, 다름도 인정하고 그걸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사랑은 그토록 거대한 것이 아니며, 개개인의 사랑을 확대해석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사랑 없이는 못 산다 는 전제를 가졌다면 그 ’ 사랑‘은 혹시 에고이즘의 발현이 아닌가 생각해 봐야 한다.
그토록 절절하지 않아도 된다.
젊어서 서로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세월이 흘러서는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면 된다.
사랑, 그게 뭐 별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