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빨간 머리 Anne

by 백당나귀

거실 한쪽 자리에 Anne zone이 있다.

당근으로 나눔 받은 2단 장식장에 빨간 머리 앤의 굿즈가 모여있다. 나의 힐링존이다. 어린 시절 저녁 6시 15분쯤 시작에서 15분간 방송했던 빨간 머리 앤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도하는 것도 흉내 내보고, 상상하며 중얼거리다 엄마에게 혼나기도 했다. 어릴 시절 갖고 싶었던걸 말하지 못하고 이미 가지고 있던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마음을 앤만 알아주었다. 벚꽃 잎이 흩날리면 앤은 뛰었다. 이 길은 자기만의 길이라며 세상을 누리는 방법을 앤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대상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 어린 나에게는 그 마음이 켰다. 앤은 심각한 일이 있어도 기도하다가, 상상하다가 곧잘 잠들어 버렸다. 자고 나면 커다란 눈망울로 어제의 일은 반쯤 해결됐다는 듯 가볍게 대하는 태도였다. 그 장면들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나는 형제가 없었던 터라 어제의 고민을 나누거나 조언을 받을 곳은 없었다. 그래서 앤을 따라한 적이 많았다. 소설인 듯 소설 아닌 앤은 진짜 친구였다. 나름 고민이라 생각하는 걸 중얼거리다 앤처럼 잠이 들고, 다음날 앤처럼 혼자만의 고민이었음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인가? 잠을 자는 행위가 좋았다. 촉감만족은 결핍의 보충제라고 심리적으로 말하곤 하다. 결핍이든 나의 사랑이든 부드러운 이불을 턱 끝으로 비벼대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면 마냥 행복해진다. 앤처럼

'아 나에게 이런 걱정이 있지?' 억지로 기억을 재생시킬 정도로 편안상태가 된다. 그렇게 앤을 따라 하다가 잠자는 걸 좋아하게 된듯하다.


가족과 친구들이 빨간 머리 앤이 그려져 있는 물건을 보면 곧잘 선물로 사다 준다. 그때마다 나의 리액션은 끝내준다. 어디서 그런 탄성이 나오는지, 볼만한 호들갑이다. 대화도 시도한다. 중얼중얼. 그때는 어린 내가 나와 환송을 하는 느낌이다. 나도 맑아진다. 마음속에서 세월을 잊고 지내는 나의 앤은 나를 그렇게 회복시켜 준다. 빨간 머리 앤은 알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갖고 싶은 게 무언지 알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지 어릴 적 나를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어릴 때 빨간 머리 앤을 만난 것이 행운이다. 이렇게 잘 성장했으니, 마닐라 아주머님과 매쉬 아저씨도 내가 기특할 것이다.

"오호, 네가 늘 밖에서 서성이던 앤 친구구나!"

"마닐라, 친구가 왔는데 간식이라도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참견하지 말아요!"


노트북에 붙어있는 빨간 머리 앤 스티커를 보며 나의 아침은 이렇게 열렸다.

빨간 머리 앤과 함께하는 하루를 상상해 보니 더 신이 나기 시작한다.

사무실에 가면 머그컵, 마우스패드, 달력, 열쇠고리... 나를 기다리는 앤이 있다.

만나러 가야지

오늘 하루 신나게 빨간 머리 앤과 함께 놀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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