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by 백당나귀

밤새 깃털 같은 눈이 왔다.

창 너머로 빛이 넘어와 더 누워있기 아까웠다. 창문을 열 용기는 없었으나,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볼 정성은 있었다. 어둠에 반짝이는 빛이 어제 만난 친구의 눈빛 같았다.


"나야 뭐 해?"

"응 앉아있어!"

"지나가다가 보고 싶어서, 나올 수 있어?"

"응 옷만 갈아있고 나갈게"


2년 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나는 2분 만에 후다닥 나갔다.

20년이 넘은 사회에서 만난 친구다. 나의 인연에 어떻게 이런 길운이 있었는지 고마울 따름이다. 1~2년에 꼭 한 번씩은 본다. 한쪽이 핸드폰을 분실해도 어떻게든 연락이 되는 친구다. 서로가 끈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를 만나면 무장해제되어 만사의 이야기를 다 풀어낸다.

건강부터 노후 죽음까지. 그전에는 남편, 아이, 교육, 돈 벌기 주변이야기가 많았는데 이젠 둘만의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둘이 50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어깨를 붙이며 소곤소곤거렸다. 나의 박장대소에 소리가 나가기도 했지만 소곤거림은 말랑거림이었다. 우리는 죽을 때 평온을 느끼고 싶어 했고, 노후에는 완전한 독립을 기대했다. 자식이든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도록 노후관리해서 때가 되면 금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는 대서사였다. 아줌마 둘이 앉아서 꽤 근사한 시간을 가졌다. 미래설계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있던가? 철학자 이름은 못 찾아내도 인생의 철학이 녹아났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부자가 되었다.

불쑥 찾아와 나오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나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허탕을 칠 수도 있는데 집 앞까지 발길 닿는 대로 와준 친구가 나를 리치하게 했다. 어쨌든'리치언니' 로망을 실현했다. 가끔 아줌마들 사이에서"리치 언니, 리치세리"하며 부러움을 말할 때가 있다. 그 후일담을 남편에게 들려주면 "명품백 하나 사줄까?" 하며 무심히 미끼를 던진다. "아니, 내가 명품이여~어디다 뭘 걸칠 거야!" 낚시질을 덧없게 해 버린다. 사실, 속으로는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막상 실물이 거론되면 머뭇거려진다. 덧없게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다. 그걸 어디에 들고 갈 거며, 자랑을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마음을 어떻게 누르나 싶은 생각에 안 갖기로 했다. 마음으로 나는 오래전부터 '리치언니'였음으로 달랬다. 불쑥 찾아온 친구가 나를 리치언니로 증명해 냈다.


갑자기 내린 눈은 마을을 동화 속으로 만들어버렸다. 햇살에 비치면 마당을 덮은 눈은 저수지 윤슬처럼 아름다워질 것이다. 거기에 강아지 발자국이 새겨지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풍경을 감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상상을 하는 내가 명품이지 않을까? 글을 쓰며 덧붙여 본다. (갖고 싶은 욕망을 우아하게 달래는 중이다)


친구와의 회포는 길지 않았지만 겨울을 버텨낼 만한 온기를 주고 갔다. 무장해제되어 만나는 친구가 있다는 게 이렇게 큰 뿌듯함일까? 남편에게 그 친구자랑은 끝나지 않고 있다.


작년에 농사지은 고구마라도 몇 개 싸서 보낼걸... 마음이 서운하다.

"친구야 내년에 보려나! 올해는 네 몫을 따로 저장해 놓으마!"


"헬로 리치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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