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 산책 일기
봄날의 화려한 꽃과 싱그러운 잎을 마주할 때면, 나는 그 찬란함 뒤에 숨은 '겨울눈'의 시간을 먼저 떠올린다. 마치 아기 씨앗을 품듯, 나무는 겨우내 가장 소중한 것을 제 몸 깊숙이 간직한다. 그 인고의 시간을 알기에, 나는 추운 겨울이 오면 보물 찾기를 하듯 숲 속의 겨울눈들을 찾아 나선다.
겨울눈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낸다.
겨울눈의 얼굴들, 그 모습이 어찌나 개성 있고 영리한지 들여다볼수록 웃음이 난다. 느릅나무는 원숭이 얼굴을 하고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고, 아까시나무는 무서운 가시 밑에 잎눈을 숨기고 있다. 칠엽수는 반짝이는 끈적한 액체를 온몸에 바르고 매서운 칼바람에 맞선다. 목련은 복슬복슬한 포근한 털외투를 입고, 그 안에는 가죽옷을 겹겹이 껴입어 냉기를 차단한다.
그들이 이토록 치열하게 자신을 감싸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는 소중하니까."
나도 겨울 숲에 나설 때는 내의를 겹쳐 입고 장갑과 모자를 챙긴다. 등에는 핫팩도 하나 붙인다. 이것은 단순히 추위를 피하는 것뿐 아니라 나를 귀하게 여기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아끼고 돌볼 때, 비로소 그 넉넉해진 마음으로 타인을 돌볼 여유가 생긴다.
나는 매일 나를 칭찬한다. 집을 깨끗이 정돈한 나를, 가족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린 나를, 친구에게 작은 진심을 전한 나를 토닥인다. 그런 칭찬은 나를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게 만든다. 오늘 마을 숲 교육을 가며 챙긴 작은 초콜릿처럼, 나를 채운 기쁨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흘러간다.
겨울눈의 껍질을 살며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미 완벽한 봄이 설계되어 있다. 가을이나 여름부터 준비한 이 단단하고 야무진 속살을 마주할 때면 세상이 좀 더 살만하게 느껴진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내일을 준비하는 겨울눈처럼, 나 또한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세상과 나누려 한다.
내 안의 겨울눈이 꽃을 터뜨릴 그날을 기다리며.
내가 겨울눈에 더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된 건, 호수공원에서 만난 붉은자줏빛 빌로드 옷을 입은 미국산딸나무 덕분이다. 처음 그 나무의 독특한 꽃눈을 발견했을 때, 이름을 몰라 한참을 애태웠다. 궁금증으로 가슴을 졸였던 그 시간만큼 그 나무는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봄이 오면 언제 꽃이 필까 손꼽아 기다리는 나의 소중한 나무 친구가 되었다.
꽃이 피어날 때면 나는 그 나무를 찾아가 나만의 작은 의식을 거행한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나무와 눈을 맞추고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꽃 피우느라 정말 애썼구나, 나무야!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하자." 매서운 바람을 견디고 속살을 터뜨려 꽃을 피워낸 그 숭고한 수고를 알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나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처럼, 나무에게도 그 진심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꽃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겨울은 더 이상 춥거나 지루하지 않다. '곧 피어날 거야'라는 기대만으로도 겨울 내내 내 마음은 이미 봄이다. 칠엽수가 투명하고 진득한 수지로 몸을 바르고 목련이 털옷을 껴입듯, 나 또한 '기다림'이라는 따뜻한 옷을 입고 겨울을 난다.
세상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그 안의 생명력을 응원하는 이 기쁨!
이 따스한 온기를 혼자만 간직하기 아까워 오늘도 나는 사람들에게 전할 작은 초콜릿과 다정한 마음을 챙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눈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무시무시한 가시 사이에 숨겨진 아까시나무의 잎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