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명! 내가 가르치는 물리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수이다. 요즘 학생은 모든 과목을 교육과정 편성지침에 따라 정해진 수업을 듣지 않는다. 자기가 선택한 과목만 듣는다. 이들 13명은 물리를 선택했다. 그중 수업을 듣는 학생은 단 1명 뿐이다. 나머지는 자거나, 다른 과목 책을 본다. 13명 뿐이니 등급이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이들은 수능에도 물리과목 시험은 치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까.
나는 수업 준비를 한 명을 위해서 한다. 한 이론 혹은 법칙이 나오기까지 과학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든다. 수많은 과학자가 연구를 거듭하면서도 의문을 가졌던 일을 이야기로 만들어 흥미진진하게 펼칠 준비를 한다. 또 그 의문 가득한 과정을 과학자가 가진 기발한 생각전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도 얘기로 만든다. 학생도 그럴 잠재 능력을 가졌다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준비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용기를 주려고.
이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쓰러진다. 눈을 반짝이던 그 학생마저 지루한 표정을 지을 때다. 나도 그만 분필을 놓는다. 더 이상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슨 얘기를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 학생 앞에 수업은 이미 소용이 없다. 결국 준비해간 이야기는 뒷전으로 하고 진도만 맞춰 원맨쇼를 하다 제풀에 지쳐버린다. 돌아서 나오면 뭣 때문에 수업을 준비하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이전에는 가르치는 과정에서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다. 지금은 바뀌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으려는 생각을 갖도록 해줘라고 한다. 동기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동기는 바깥에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수업에 적극 참여하는 학생에게 주려고 젊은 교사들이 사탕을 준비해 가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외부에서 주는 동기가 학생에게 공부하도록 만들면 스스로 공부하겠다는 열정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맞는 말이고, 좋은 생각처럼 보인다.
수업에 참여하려는 학생은 교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보인다. 처음부터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학생은 자세에서 드러난다.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지 않고, 책상 밑으로 다리를 쭉 편 상태에서 상체를 뒤로 제껴 앉아 있거나 처음부터 엎드린 학생이다. 이 학생에게 바른 자세로 앉으라니, 수업에 참여하면 사탕을 주겠다느니 하는 말은 소용이 없다. 헛소리일 뿐이다. 선택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수능에 응시하지 않을 텐데, 대학 입학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그는 수업을 거부한다.
공부는 의문을 가질 때 가능하다. 의문은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난다. 관심은 호기심이다. 하나의 사건을 뭉뚱그려 ‘그것은 이것이 파생된 것 혹은 유사한 것’처럼 얘기하는 순간 호기심은 사라진다. 익숙한 일이라도 지난번과 어떻게 다른지,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를 살필 때 호기심은 발동한다. 예를 들어 점심에 나온 반찬을 몽땅 묶어 반찬이라고 하지 않고 김치, 닭볶음 등으로 각각 쳐다보면서 이것은 이전에 먹었던 맛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할 때 호기심이 생긴다. 그때 어떻게 만들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공부도 그렇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고, 의문도 생기지 않는 내용은 책을 찾아 보지 않는다. 책을 보지 않으니 새롭게 알고 싶은 내용이 생길 리가 없다. 그는 그 수업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어떨까. 교사인 내가 듣기 싫거나 관심이 없는 내용을 연수받을 때 자세를 생각하면 그의 행동이 이해된다. 얼마나 지겨울까. 그에게는 앞에서 열강을 하는 교사 목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내 수업을 듣는 13명! 이 학생에게 어떤 방법으로 물리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교육학자가 얘기하는 방법을 동원하면 그 학생 마음이 돌아올까? 이공계 대학에서 공부하려면 꼭 필요한 과목이라고, 열심히 하지 않아도 귓등으로라도 들어두라는 얘기만 메아리 없이 흩어진다. 교실에 오기 전에 그는 자기 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앉아 있는 학생은 좀비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