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전 토요일 오후 삼락 둔치 벚꽃 구경을 다녀왔다. 한 주일 전에 보았을 때 꽃 몽우리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정도였는데 일주일 사이 많이 피었다. 모두 활짝 피어 꽃 터널을 이루는 때도 좋지만 지금처럼 아직은 봉오리가 떠지고 있는 것이 달려있는 때가 나는 더욱 좋다. 꽃이 터지기 직전의 간질간질한 느낌도 좋지만 아직은 희망이 느껴져서다. 활짝 피어 달빛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청춘을 기다릴 수 있어서다.
아내와 나는 이맘때쯤에는 꽃을 보러 다닌다. 몇 주 전에는 매화 축제를 다녀왔다. 매화가 알싸하게 차가운 한기 가운데 느끼는 꽃이 주는 희망이라면 벚꽃은 봄이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느끼는 찬란함이 매력이다. 달빛 아래에서 즐겨야 벚꽃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낮에 봐도 언제나 찬란하게 빛난다. 꽃 아래 자리를 펴고 준비해 간 막걸리 한잔을 아내와 나누며 지난 시간을 얘기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꽃을 좋아하면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말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젊을 때는 아이 키운다고 둘이서 꽃 구경을 다녀본 기억이 없다. 아파트 주변에 핀 꽃을 보면서도 특별한 감흥을 느꺼나 아내와 함께 그것을 감상해 본 기억은 더욱 없다. 늘 옆에 있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것이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제 아이는 제 길을 가고 있어 여유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옆을 돌아볼 마음에 여백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출근해서 학생 얼굴을 보면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각이 든다. 젊을 때는 학업성취가 떨어지는 학생을 보면 왜 열심히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학생의 학업성취를 그 학생의 몫으로만 생각했다. 불혹을 넘어서 지천명을 전후해서는 학생 뒤에서 있는 배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성한 가지와 튼튼한 울타리가 보호해 주는 모습의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이 보였다. 지금은 학생의 학업성취는 관심 밖이다. 그가 품고 있는 씨앗, 그것이 어떤 형태로 꽃을 피울지 궁금할 뿐이다.
한 녀석이 사관학교를 가려고 준비한다고 했다. 그의 선택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 선택을 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제복을 입고, 행진을 하는 멋진 모습 보다 그 속에서 겪어내야 하는 어려움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 많은 밤을 뒤척였을 것이다. 목표를 정했으니 가는 길만 남았다. 지금 그는 빨갛게 물들어 가는 꽃봉오리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단지 무엇인가를 이뤄야겠다는 목표보다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 설렘은 젊을 때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꼭 이뤄야겠다는,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앞서야겠다는 생각은 크게 없다. 마음속에 꼭꼭 묻어두었던, 여유가 생기면 꼭 하고 싶었던 것을 시작하는 즐거움이다.
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기타 반에 등록했다. 시간이 나면 꼭 배우고 싶었던 통기타이다. 아들이 배우다 줄이 끊어진 통기타를 수리한 지 두 해가 지났다. 그 기타를 볼 때마다 어디서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출근도 해야 하고, 방통대 공부도 해야 할 것 같고, 안 해야 할 핑계거리는 수없이 많았다. 그러다 슬며시 아내에게 기타를 배우러 가야겠다고 하니 당장 문화센터에 알아봐 주고 등록까지 마쳐주었다. 가슴이 설렜다.
파나소닉 창업자 마츠시다 유키노스케는 “청춘이란 마음의 젊음이다. 신념과 희망에 넘치고 용기에 빠져 하루에 새로운 활동을 계속하는 한 청춘은 영원히 그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 희망이라는 목표를 향해 용기를 갖고 새로운 활동을 하는 사람은 청춘이라는 말이다. 희망이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용기만 내면 가질 수 있는 보석이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의 가슴과 만남 때문이다. 활짝 핀 꽃도 빛나지만 팝콘처럼 터지기 직전에 있는 봉오리도 예쁘다. 봄이 알리는 시작의 척후병이, 희망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각이 바뀌어 가고, 그에 따라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어 간다. 주변도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린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