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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뼘 남짓 자란 고추를 보면서

by 최정곤

텃밭에 고추 키가 여전히 한 뼘 남짓하다. 옆 이랑에 고추는 이미 키가 내 허리 정도까지 온다. 고추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옆 이랑에 수박을 심기에 나도 따라서 몇 포기 심었다. 내것은 아직도 순이 자라고 있는데 옆 밭에는 수박이 농구공만하다. 아내는 이랑마다 흙이 달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일주일에 한 번 가서 물을 주는 나와 서너 번 가서 물을 주는 그, 그와 나의 작물에 대한 관심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 목표가 정해진 학생들은 바쁘다. 전략을 세워 공부하느라 책에 코를 박고 있다. 그들은 수업 시간에 들어가 출석을 부르기도 전에 벌써 자습을 달라고 떼를 쓴다. 내 과목이 물리지만 물리를 그 시간에 하는 학생은 없다. 물리학은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기타과목이다. 특별히 요구하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내신으로 끝낸다.

그런데 한 학생이 물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책상 위에 책만 펴놓고 넋을 놓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를 몇 바퀴 돌아 보는 동안 그 학생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손에는 연필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론을 살펴보나 싶었지만 눈치를 보니 아니었다. 살짝 물었다. 문제를 이해하느냐고.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리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도 물었다. 또 대답이 없었다. 너에게 절실한 것이 뭐냐고, 아니 가고 싶은 대학은 생각해 봤냐고 물었다. 고개만 저었다. 난감했다. 그 학생이 물리책을 펴놓은 이유를 그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기말고사 기간 동안 나와 시험 범위를 공부했던 학생이다. 기말고사 두 주전부터 시험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물리 공부를 할 사람은 나와 함께 공부하자고 했더니 서너명이 지원했는데 그중 한 학생이다. 수업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그 외 학생도 중간중간 나의 설명을 듣는 학생도 있었지만 그는 유독 집중했다. 그러니 나도 그에게 집중해서 질문하고, 설명했다. 그는 그때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문제 내용마저 해석이 되지 않았는데 나와 함께 풀어가니 이해가 되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가 물리 문제지를 펴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를 보니 안타까웠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도 교실을 한 바퀴 더 순회하면서 고민했다. 그에게 숙제로 지금까지 칭찬을 들었거나 상을 받은 것이 있거나 혹시 관심을 가진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냈다. 아버지 직업이 자식의 진로와 직업을 결정한다는 세상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이전에는 달동네라는 곳에 있다. 학교 진입로에 단층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 학생도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칭찬과 격려, 부진한 학습을 보충해 줄 수 있는 환경은 꿈도 꾸지 못했지 않았을까 싶었다.

2022년 김회재 국회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소위 SKY라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약 절반이 소득 9, 10분위라고 했다. 고소득층 아이라고 모두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초·중학생일 때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학습 능력이 좋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그런 통계나 연구를 보지 않아도 이런 현상은 약 35년 교사로 재직하면서 수없이 보았던 일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가뭄에 콩나듯 볼 수 있을 뿐이다.

갈 길을 몰라 멍하니 앉아 있는 학생이 어디 그뿐일까. 수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엎드린 학생, 등을 쓰다듬으며 깨우지만 그때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부추기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지금까지 한뼘밖에 자라지 못한 고추가 비가 온다고, 물을 자주 준다고 쑥쑥 자라 한두 주 사이에 옆 밭 고추와 키가 같아질 수 있을까. 학생이 공부하는 능력과 내 텃밭에 고추 키는 그들 능력이 아니라 자라는 과정에서 받았던 관심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만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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