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슬며시 내려앉는다. 나무는 속에서 만들고 있었던 색을 내놓기 시작했다. 길러리 가로수 은행나무, 아파트 뜰에 있는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은 자기만이 낼 수 있는 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여름동안 한결같이 짙푸르기만 해서 모두 같은 색인줄 알았는데 그들은 모두 자기 색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추석이 낀 연휴가 끝나면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는 긴 연휴가 잔인한 시간이다. 연휴라 친지와 만나 얘기도 나누고 즐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뉴스에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수능과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 얘기가 나왔다. 그들에게 연휴는 힘든 시간이다. 어떤 문이 열릴지 알 수 없지만 여기저기 두드려 본다. 고등학생은 자기 능력을 키우는 단계이다. 취업 준비와 수능을 준비하는 이는 마음속에 정한 문을 열기 위해 9부 능선을 넘고 있다.
젊은 선생님을 보면 하루 종일 가르칠 준비를 한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학생에게 가르치기 위해 새롭게 다듬고 있다. 자신이 알기 때문에 학생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소위 지식의 저주라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노력하고 있다. 그 속에서 그는 자기 생각을 다듬고, 정교하게 깍고 있다. 동료와 전공지식을 토의하면서 자기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중년에 들어선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칠 준비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는 학생을 가르칠 전공도 보지만 새로운 길도 엿본다.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길로 들어서려고 발걸음을 내민다. 자기가 전공하지 않았던 분야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발을 쑥 담그고 싶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이 길을 막고 서 있다. 그가 디딘 발은 한 부서를 담당한 매니저이거나 그와 비슷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지만 쉽지 않다.
그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슬며시 돌아본다. 수업에 들어가 학생을 보면 그들 모습에 내 그때 모습이 투영된다. 그들이 당시 나와 다른 점은 수업 내용을 교사인 나외에 다른 곳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인강이다. 교육청에서 무상으로 배부한 컴퓨터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그것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는 학생도 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책과 참고서, 그리고 선생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성적향상이 쉽게 되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 긴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젊은 선생님, 중년의 선생님을 보면서 내가 처음 발령받았던 때, 가르칠수록 어려웠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교사로 처음 발령받았을 때 어깨가 절로 으쓱했는데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서 공부했던 책을 다시 보고 또 봤다. 그렇게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고,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것으로 공부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박사학위는 이제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뿐이네.”라고 하셨던 지도 교수님 말씀이 옳았다. 학위를 받았던 주제와 관련된 연구뿐만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방법도 수없이 공부해야 했다.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안개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작가 알렉산더 스미스는 가을을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이 어우러지는 시기라고 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가을 나뭇잎 속에는 봄의 따뜻한 햇볕 속에서 내밀었던 여린 잎의 기억과 강렬한 여름 햇빛을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기억이 함께 들어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겨울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준비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왜 공부하는지, 어떤 문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고등학생 시절. 사회 초년생으로 학생 앞에 섰던 새파란 꿈을 꾸었던 시절. 새로운 길을 열어보려고 버둥거렸던 시절. 그 모든 것이 어울려 어느 순간 그만이 낼 수 있는 색을 발하게 된다. 자신은 보기 어렵지만 자기만의 색은 찬란하게 빛난다. 가을이 그저 오는 것이 아니듯 삶의 시간도 덧없이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모두 가을 색으로 드러낼 자신의 색을 다듬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