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삼남매 늦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지극히 받고 커서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알았다.
오빠,언니가 내 위로 둘 있는데 나이차이가 커서인지 대화의 큰 교류가 없어 또래의 가치관 그리고 대화법을 잘 몰라 사회성이 좀 떨어진 아이가 아니였나 싶다.
실제로 어린시절 안하무인같은 부분이 있어학교폭력과 왕따를 당해 트라우마가 생기기도했지만 처음으로 지구가 내가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세상이라는걸 깨달았으니 댓가를 톡톡히 치룬 보람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클래식을 좋아했으며 엄마의 표현에 따르자면 하이클라스 답게 놀고 그런 종목의 일을 빨리 선택하길 원했다.
그래서 우리 오빠는 첼로를 전공하였고나 또한 초등학교 3학년때 첼로를 시작하게 되었다.
뭣모르고 잡았던 첼로였는데 엄마와 오빠는 첼로를 잡고 있던 내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크게 칭찬을 했다.
사실 나는 첼로에 관심도 없고 그냥 뛰어노는게 가장 좋은 뽀로로친구 같은 아이였는데 첼로의 활을 긋는 내 모습의 어딘가가 오빠의 심금을 울렸는지첼로에 큰 재능이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통에 오빠 대학교 교수님까지 뵈러 가게 되었다.
나는 정말이지 어디가 재능이 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는데 오빠의 대학교 교수님 또한 나보고 첼로를 위해 태어난 아이라는 덕담을 해주신 통에 나는 지옥같은 첼리스트 여정에 한발 다가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왜 지옥같은 첼리스트라는 표현을 썼냐면 첫번째는 앉아서 하루종일 연습하는것이 가장 힘들었고 두번째는 첼로를 가르쳐주던 스승이 친 오빠였는데 우리오빠는 그 당시 지옥에서 돌아온 저승사자마냥 나를 덜덜 떨게 만드는 무서운 사람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는 첼로를 하면서 단 한번도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거나 첼로가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설레임을 느껴본적이 없었기에 첼로와 함께했던 시간은 사실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은것이 하나도 없다.
한명의 천재 아티스트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님이나 서포터의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예체능쪽에서는 서포터의 체계적인 연습량 체킹과 스케쥴을 관리하며 옆에서 헌신적으로 투자해야만 한 아이의 재능이 꽃피울수 있는데김연아의어머니,박지성의 아버지,손흥민의 아버지가 유별난 것이 아닌 예체능을 하는 자식을 둔 부모라며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집 부모님은 집이 기울어 먹고 사는것에 지쳐있었고 아버지의 실직, 어머니의 갱년기 히스테리 그리고 두분다 이미 50대 지천명을 넘어 힘이 없는 모습으로하루하루 버티며 살고 있던터라 나라는 아이에게 큰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관심과 사랑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잘하고 내 성적이 얼마나 바닥인지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것이 있다면 믿어주고 아침밥을 학창시절 내내 챙겨주셨으며 엄마,아빠와 고3까지 함께 잤다는것만 봐도 나는 큰 사랑을 받고 자랑 늦둥이 막내딸이였다. 그러나 재능적으로는 사회에서 떨어질수 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오빠는 그 점에 있어 부모님께 크게 분노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때 체계적이 연습없이 띄엄띄엄 첼로를 하던 내가 선화예술중학교 입시를 위해 1년을 벼락치기처럼 연습하여 말 그대로 천재코스프레를하며
예술계로 입문하려했다.
하지만 예술은 진심이 없다면 들통나는 법인가보다. 열심히 실기시험을 준비하여 시험을 보러간날 내가 연습한 부분을 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시험을 보던 중간에 면접관 선생님께서 내가 연습하지 않은 다른 부분을 해보라며 미션을 던져준 통에 나는 보기좋게 걸려 넘어졌다.
그날의 시험은 내 인생 통틀어 대학교까지 실패의 고배를 마시게 한 쓰디쓴 첫잔이고 독배가 되었었다.
일년을 꼬박 준비했는데 울며 겨자먹기로 일반 동네중학교를 다니게된 내 영혼의 긴 방황이시작되었다. 첼로를 좋아한건 아니였지만 내가 좋아한건나도 하이클라스 단체에 어울리는 보기좋은 아이라는 타이틀이였는데 그리고 첼리스트라는 나를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설상가상 집안은 더욱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하여 첼로를 할 수 없었고 내가 선택한적도 없었지만 내가 그만둘수 있는 선택또한 잃어버리게 되어 나는길 잃은 동네 강아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티스트를 꿈꾸며 ‘배우’라는 꿈을 위해 다시 연기를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예술고등학교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중학교 3학년 내가 선택한 첫 입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또 다시 나는 입시실패의 고배를 마시며 또 한번 일반고등학교의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 입시실패의 트라우마는 나를 계속해서 도전하게 하고 또다시 실패를 반복하며 무려 대학교도 4수까지 하게 했으니 이정도면 '입시실패 마스터'라는
표현으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지금생각해보면 당연했던것 같다.
지금 내가 사업을 하며 쏟아붓는 노력을 생각하니 사실 예술가와 아티스트로서의 성공을 원한다면 적어도 이정도는했었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나도 안일했고 사실 내가 필요했던것은 예술가라는 타이틀 그 자체였지 예술은 아니였던것같다.
나를 떨어트린 면접관 선생님들이 처음엔 이해가가지 않았었는데 지금보면 그들은 정말 전문가였다는것을 느낀다.
늘 실패에 익숙했고 실패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13살부터 23살까지 무려 10년동안 나는 실패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나는 길을 잃어버린 서글픈영혼을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렸다고 꿈을 꾸는 법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
무엇을 꿈꿔야하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길을 잃은 그 자리에서 기도했다. 내 열정과 그동안 쌓인 나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달라고 ..
그 기회가 나에게 온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내보고 달려보겠다고..
세상에 쓸모 있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인정받고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나를다시한번일으켰고 또 다시 '꿈'을 꾸게했다.
때로는 내가 생각했던 길보다 다른 길이 있다면 멈춰서 있지말고 그 길을 따라 쭉 걸어가볼만 한것 같다.
그 당시 실패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지금 내가하는 사업에 큰 영향을 줄때가 많으니 말이다.
음악을 배웠던 그 감성, 연기를 배웠던 그 표정 등등 오히려 사업이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예술활동들이 내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좋은 대학교를 갈때 예체능활동을 꼭 본다고 하던데 실제로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서 아이들 있는 부모님들에게 많은 경험과 예술활동을 배울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았던 내 소원들은 나를 불행한 사람인것처럼 착각하게 했지만 꿈은 이루어진다.
다만 어느 시기에 이루어질지를 내가 잘 알지 못할뿐 계속 길을 걷고 꿈을 꾸다보면 어느날 ,어느때 내게 가정 적합하다라고 생각이는 되는 때에 이루어지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