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의 선조

by 서운인혜

고등학교 시절 국립중앙도서관에 가서 『선조실록』을 찾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특히 궁금했던 부분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모습인데, 글을 읽으며 제가 지닌 편견이 상당 부분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때로 우리의 통념을 거스릅니다. 물론 우리가 기존에 지닌 사고의 틀을 넘어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역사를 다룰 때 우리는 진실 앞에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선조에 대한 지문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역사 서술에서 ‘영웅 담론’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무능한 군왕과 뛰어난 충신의 대비는 후자를 더욱 빛나게 하고, 참혹한 전쟁의 책임을 군왕 한 사람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민중의 분노를 위무하고 시대의 상처에 일종의 해방구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에 봉사해야 하며, 찬란한 영웅을 세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림자를 짜 맞추는 순간 우리는 진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게 된다. 위인을 기리는 것은 역사의 도리이지만 그 위인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배경의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단순히 영웅의 등장과 무능한 군주의 대비로 환원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는 ‘국가’라는 유기체의 지속성과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조선 조정의 고뇌와 대응이 존재하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이다. 일반적으로 선조는 전란 초기 의주로 피난한 사실로 인해 무책임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그 행위는 당시의 정치 제도와 국가 개념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일본의 침략은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이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을 지나간다는 구실을 붙인 것이었으나 실상은 조선의 국가적 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하려는 야욕을 숨긴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 일본은 선조의 존재를 조기에 제거함으로써 국가의 주권과 외교적 정통성을 단절시키고, 이후에 예상되는 백성들의 저항을 질서 붕괴 이후의 무정부적 반동이나 국지적 게릴라 저항으로 치부하고자 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단위의 항쟁을 부정하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전쟁 내내 왕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를 유지하였고, 국왕 선조의 존재는 국가의 정통성과 주권을 담보함은 물론 조선의 전쟁이 국가적 항쟁임을 드러냈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포를 기습적으로 침공하고,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개경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했다. 당시 『선조실록』은 그 상황 속에서 매우 복합적인 군주의 고뇌를 기록하고 있다. 실록에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라며 죄책에 괴로워하는 선조의 탄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왕이 곧 국가”라는 절대 군주 중심의 통치 구조를 가졌고, 국왕의 신변 안전은 곧 국가의 존속을 의미했다. 『선조실록』 25년 6월 3일 자 기록에서 선조가 의주로 향하면서 “내가 군사와 백성을 버리고 간다고 하나, 내가 죽으면 나라 또한 망한다. 차라리 살아서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낫다"라고 진술한 대목에서, 이것이 도주가 아닌 생존을 통한 '국체(國體)의 유지'라는 명확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선조의 판단은 역사적 선례와 제도적 맥락 위에 놓여 있었다. 고려 말 원나라 내정을 피해 몽진한 공민왕의 사례는 왕권 공백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선조는 이러한 교훈 위에 국가의 외교·행정 중심축을 유지하기 위해 전 조정을 이끌고 서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실록은 “선조가 왕도를 지키기 위하여 잠시 몸을 의주로 옮겼으나, 임금을 잃지 않은 백성들은 다시 나라를 믿을 수 있었고, 각지의 의병들은 왕명을 받들어 전장에 나아갔다”라고 기록한다. 이는 왕권의 유지가 개인의 안위 문제가 아니라, 당시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의 존속을 나타내는 핵심 축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왕이 멀리 변방에 있으나 아직 생존해 있으며 조선의 정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렸는데, 이는 외교적 정통성을 지키고자 한 선조의 노력을 드러낸다.

선조는 국왕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전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왕세자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설치하도록 명하여 군정과 민정을 위임했다. 1592년 6월 4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다스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분조는 문자 그대로 조정(朝廷)을 분할해 두 개의 조정을 동시에 운영하는 형태였다. 이는 단순한 지방행정의 파견이나 위임이 아닌, 국왕 대리의 이름으로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임시정부적 성격을 띠었다. 자신은 의주에 머무르며 외교 활동 등으로 왕조의 명맥을 이어가고, 세자 광해군을 통해 조선 남부 행정을 지속한 것은 국가 주권을 굳건하게 지속하려 한 선조의 전략이었다. 광해군은 병력 동원, 식량 조달, 지역 방어 등 실무 행정 외에도, 일본과의 교섭 및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접촉까지 수행했다. 사실 분조라는 발상 자체는 국가가 두 조정으로 나뉜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구조였기에 내적 혼란을 야기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분조는 오히려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의 정통성과 중앙의 권위가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대의를 위해 조선이 새로운 체계로 유연하게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국가적 정체성과 귀속 의식을 부여한 것이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세자 광해군이 스스로 전선을 돌며 백성을 위무하고, 장수들을 총괄하니 사민(士民)이 크게 의지하였다”라고 분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주의 선조는 왕의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였던가? 일부 학자들은 선조의 불필요한 인사 교체나 간신에 대한 의존이 전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조차 선조가 신속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에 회의만 반복하고 결정을 미룬 점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왜란 극복을 향한 구심점에는 분명 선조가 있었다. 실제로 1592년 전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분석해 보면, 군권이 장수들에게 위임되는 와중에도 군수품 배분, 인사권, 외교적 명분 등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은 계속해서 왕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류성룡을 비롯한 대신들도 그 권위를 전제로 정무를 수행했다. 류성룡은 국왕의 신임 아래 명나라와의 외교를 총괄하며 조선의 정통성과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군사 지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으며, 조명 연합군의 결성을 이끌어 냈다. 이는 군사 동맹을 넘어서 국제 질서 내에서 조선의 주권을 지키고, 일본의 침략을 봉쇄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전장의 영웅들은 조정과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국난 극복이라는 공동의 목적 아래 유기적으로 작동했다. 이순신은 전장에서 독립적인 판단을 요구했으나, 『난중일기』 에는 자신이 승전 소식을 조정에 어떻게 보고했는지, 국왕의 비답을 얼마나 중시했는지가 반복적으로 기록돼 있다. 권율 또한 『행재소 문서』에 따르면 "전하의 명에 따라 산성 방어를 택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곽재우는 관군이 아닌 의병장이었음에도 국왕 중심의 국가 질서 회복의 당위성을 근거로 각지 의병을 통솔했다. 한편 일본의 역사기록에도 조선 조정의 응집력을 평가하는 기록이 일부 나타난다. 일본 측 기록 『일본군기(日本軍記)에서는 “조선의 관과 민이 국왕을 중심으로 연대하였기에 전쟁이 장기화되었고, 명나라의 참전도 그것을 계기로 하였다”고 분석하며, 전황이 악화되었을 때조차 조선의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점을 주목한다.

전란기 조선을 논할 때 선조는 종종 성웅 이순신과 대비되어 무능하고 냉혹한 군왕으로 묘사되어 왔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한 일면적인 평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1593년 1월 13일 기록에는 “임금께서 밤낮으로 정사를 잊지 않고,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백성을 근심하였다”는 대목이 실려 있으며, 1594년 3월 20일에는 “왕이 폐허가 된 도성을 살피며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독려하니, 신하들이 감복하였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선조가 전란 중에도 국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깊은 책임의식을 갖고 통치에 임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선조는 전란으로 무너진 지방 행정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경국대전에 따라 관제와 군제를 재정비하였으며, 특히 의정부와 병조를 중심으로 병력 동원 체계를 재구축하는 데 힘썼다. 이는 행정 복구를 넘어, 국가 기능을 회복하고 조선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조치였다. 나아가 그는 허준에게 『동의보감』의 편찬을 명하여, 전쟁으로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한 의학적 기반을 세우고자 했다. “백성이 병들어 고통받는 것은 임금 된 자로서 참으로 애통한 일”이라며 시작된 이 작업은, 동의보감의 서문에 기록되었듯이 “가난한 백성도 쉽게 쓸 수 있어야 한다”라는 뜻 아래 진행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시혜가 아니라 도덕적 통치의 실현이었다. 이처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백성을 향한 애민의 마음을 견지하며 국가 재건을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에 힘쓴 선조의 모습은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역사적 진실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적 진실을 마주함에 있어 우리는 『징비록』 서문에 담긴 류성룡의 깊은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나라가 기울 뻔한 것은 군신이 모두 방심했기 때문이요, 다시 일어선 것은 각자 본분을 다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며, 전란을 무능과 혼란의 결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영웅을 찬양하기 위해 내부의 세력을 희생양으로 삼아 진실을 왜곡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역할을 다한 이들의 노력이 모여 조선을 다시 일으킨 ‘구조적 생존의 역사’로 임진왜란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분명 선조가 있었다. 그가 군주로서 수행한 책임이 국가 재기의 중심이었음이 역사기록 곳곳에 드러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편협하고 단면적인 평가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복합적이며 성찰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진실은 때로 익숙한 통념을 거스르고 기존 사고의 틀을 흔들지만, 그럼에도 더욱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대상이다. 이제 우리는 익숙한 도식 너머에서 선조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실록은 선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난리가 급박할 때 깊이 고심하여 군신 간 신뢰를 회복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으니, 이는 위태로움 중의 정사(政事)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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