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사회가 키운 아이 -
라온이는 제 교실에 오는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5학년입니다. 늘 밝은 표정과 언행에서 조급함이나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이예요. 이런 라온이를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쌍꺼풀이 매력적인 눈을 보면 라온이가 다문화 가정 자녀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지요.
"이걸 틀렸네. 다시 풀어 보자."
"아~예. 틀~릴~ 수도 있지요. 뭐~, 다시 풀~어 볼~ 게요."
라온이는 한글 공부를 할 때도, 마치 천자문을 읽는 서당의 아이처럼 소리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이 분명하게 읽지요. 어느 때는, 제가 그걸 들으면서 웃음이 터지기도 합니다.
라온이는 금요일 오후, 방과 후에 제 교실에 와서 두 시간 동안 국어와 수학 보충학습을 합니다. 제가 학년을 구분하여 딱히 정한 규칙은 없지만, 라온이가 5학년이니까 당연히 학습 시간이나 분량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욕심을 내지요. 그러나, 매번 제 계획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라온이는 끝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똑같은 말을 합니다. 행여 제가 더 붙잡아 둘까 봐 걱정인 것이지요.
"선생님, 센터(지역아동센터) 선생님이 기다려요. 오늘 빨리 오라고 했거든요."
라온이는 세 살 때부터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에 맡겨져 자랐다고 합니다. 결혼 이주 여성인 어머니는 라온이가 세 살 때 이혼하여 떠나고, 아버지가 혼자서 키웠지요. 사실, 아버지가 양육한다고 해도, 라온이가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 학원, 지역아동센터 등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깁니다. 그러니까 지역사회가 라온이를 키웠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지요.
다행히 라온이는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가족이 아닌 사람들 틈에서 자랐어도 구김살 없이 해맑은 얼굴이에요. 제가 라온이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꾸중을 해도 전혀 노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눈치도 빠르지요.
특히 라온이의 국어 실력은 글자의 획순이나 크기, 모양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쓰지만, 모르는 글자는 없습니다. 다만, 글을 유창하게 읽고 빨리 이해하지 못해서 노력이 더 필요하지요. 제가 천천히 읽어 준 다음, 읽은 내용에 대하여 묻고 대답하는 것은 그럭저럭 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긴 글은 혼자서 끝까지 읽고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받아쓰기도 엉망이지요.
또, 수학은 3~4학년 과정을 공부하는데, 구구단도 깜빡깜빡하면서 겨우 외우고 있지요. 이럴 때는, 제 때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한 라온이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 같아 안타깝지요.
라온이가 일주일에 한 번 제 교실에 오는 데다 가끔 빠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수업을 마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던 공부를 마치고 가야 한다고 하면, 라온이는 또 뻔한 수작을 부립니다. 한 번도 지키지 않은 약속 카드를 꺼내 들고 애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선생님, 제가 월요일에 와서 나머지를 하면 안 될까요? 지금 꼭 가야 하거든요."
라온이가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습에 게으를 때, 제가 나무라기라도 하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공부는 제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저랑 너무 안 맞아요."
"그럼, 뭐 할 건데?"
"그래서 제가 고민이 많아요. 뭘 하면 좋을까요?"
라온이는 곧 6학년이 됩니다. 그러나, 학습 부진이 누적된 채 6학년으로 진급하면 라온이는 정상적으로 6학년 교육과정을 따라가기가 어렵겠지요. 또 중학교에 진학하면 그 정도와 차이는 더 심해질 것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 잘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만을 최고로 쳐주는 우리 사회의 가치가 바뀌기 전까지는 라온이의 학교 생활이 결코 쉽지 않겠지요.
라온이는 학교에서도 담임 선생님이 각별히 챙겨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라온이가 공부 안 하는 거 빼고는 괜찮은 아이라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도 라온이는, 고비사막에 뚝 떨어져도 낙타 한 마리를 얻어 타고 건강하게 돌아올 것 같아요. 제 교실에서 와서 보충학습을 하는 아이들 중에 자기 교실에서도 기죽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유일한 아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라온이가 보통 국민으로서 일상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한글을 읽고 이해하며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초등학교 과정의 기초 연산 정도는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저는 라온이를 '라라도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라온이는 자기 별명을 모르지요. 어쩌면 척박한 주변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터득한 생활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라온이가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붙인 별명입니다.
저는 종종 라온이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항상 우리의 어린 라라도사가 좌절하지 않고, 학업과 미래에서 탄탄한 길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