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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Aug 17. 2023

쌍도에 가면, 열일곱 살 기억은 바다에 두자

여고동창 7인의 회갑여행 -제7화-

우리는 요양원을 나오면서 경은이 부부를 초대하여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한식을 파는 깨끗한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지요. 우리는 오랜만에 집밥다운 밥을 먹었어요. 저는 나물을 넣어 비빈 밥을 불고기와 함께 쌈채소에 싸서 먹었는데 과식했어도 속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꽃을 한 다발을 사는 것으로 우리는 쌍도에 갈 채비를 마쳤습니다. 쌍도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선도리 앞바다에 있는 섬이지요. 우리가 점심을 먹은 웅천읍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으로 20분 정도 소요된다고 검색되었어요.



쌍도는 우리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간부 학생 임해 훈련'을 갔던 장소입니다. 요즘은 쌍도가 보이는 비인 해변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지요. 우리들이 임해 훈련을 갔던 1970년대 중반에는 그저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지요. 제 기억에는 썰물 때 드러난 넓은 갯벌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조개를 잡던 모습이 아직도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학교에서는 간부 학생 훈련으로 프로그램을 계획했겠지요.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인 우리들에게는 바다로 놀러 가는 것일 뿐이었지요. 그때는 지금처럼 간편하고 세련된 캠핑 도구와 용품들도 없었어요. 펜션이나 리조트도 없어서 해변 모래밭에 텐트를 치고 자는 형편이었지요. 굳이 비교하여 말하자면, 요즘의 캠핑을 5성급 호텔이라고 하고, 그때의 캠핑은 노숙과 같다고 할 수 있지요.


[ 사진 출처: 광주매일신문, 쌍도]


우리들은 조를 편성해서 텐트부터 취사도구, 먹을 것을 기본으로 하고, 카세트테이프, 기타, 카메라까지 각각 분담해서 준비했어요. 그리고 그것들을 싸서 이고 지고 학교에 모여 운동장에서 출발하는 대절버스를 타고 갔지요. 그렇게 가다 보면 비닐봉지도 흔하지 않던 때라 어느 보따리에선가 김칫국물이 흘러나오기 일쑤였지요.  


우리들의 어설픈 솜씨와 조악한 조리도구에서는 정성을 다해봤자 덜 익은 라면과 삼층 밥이 나올 뿐이었지요. 또 가져간 김치는 다음날이면 너무 익어서 못 먹게 되었고요. 그러면 꽁치 통조림을 넣어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대충 비벼 먹는 밥도 한 끼 식사로 충분했지요. 그곳에서는 밥이 덜 익었든 타 버렸든 맵든 짜든 상관없이 다 맛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잠자리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어요. 텐트가 가장 귀한 캠핑 용품으로 부족하니까 몇 개밖에 안 되는 텐트에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들어가서 끼어 자야 했지요. 그래도 잠자리에서 들었던 파도 소리는 잊지 못할 낭만적인 추억이 되었지요.



또 그런 데서만 가능한 즐거움 중에 캠프 파이어를 빼놓을 수 없었지요. 우리들은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수건 돌리기도 하고, 기타를 치면서 캠프 송이라고 하는 노래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지요. 그때 절대 빠지지 않는 노래는 윤형주 씨가 부른 ‘조개껍질 묶어’였어요.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 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

아침이 늦어져서 모두들 배고파도 함께 웃어가며 식사를 기다리네

반찬은 한두 가지 집 생각나지마는 시큼한 김치만 있어 주어도 내게는 진수성찬 


[사진 출처: 충청뉴스 ]


하지만, 우리는 쌍도가 보이는 해변에 학생 간부 훈련의 즐거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사춘기를 지나면서 열일곱 살에 마주했던 가장 슬픈 일을 경험했던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 사고가 있었던 것은 학생 간부 임해 훈련 2박 3일 과정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우리들은 짐을 다 정리하여 길 옆에 모아두고 해변을 걷고 있었지요. 대절버스가 오면 비인면 사무소 옆 중국음식점에 가서 자장면을 먹고 가기로 하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군가 찢어질 듯 울부짖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반 연정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지요. 우리들이 본 것은 누군가 업고 오는 시퍼런 연정이의 얼굴과 축 늘어진 팔다리였어요. 그리고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곧장 학교로 돌아와서 흩어져 집으로 갔지요. 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도 아무도 연정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요.


제 친구 연정이는 열일곱 살에 그렇게 죽었어요. 그때는 통신 수단도 발달되지 않았을뿐더러, 누군가 입 다물라고 하면 귀까지 막아버리는 데 익숙한 세월이었지요. 우리끼리 속닥속닥했던 이야기는 그저 추측이고 상상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47년 만에 비인 해변에서 쌍도까지 걸어가는 모랫길 가운데서 오래오래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져간 꽃다발을 갯벌에 던졌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면 꽃은 바다를 둥둥 떠다니겠지요.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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