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를 양녀로 들이라고요?

by 전우주

드디어 시집에서 장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딸만 셋이던 큰 형님이 제가 결혼하던 해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축복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 축복의 화살은 저를 주말 베이비 시터로 지목했습니다. 큰 형님은 넷째 아이를 낳기 전부터 셋째 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겼어요. 그런데, 주말이 되면 시어머니는 저희 집에 셋째 아이를 업고 와서 내려놓고 나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아들의 집에는 아이가 있어서 그랬는지, 시어머니는 종종 저희 부부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데려갔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교사라서 아이를 잘 돌볼 것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그때 저희는 주말부부였거든요. 게다가 신혼이었지요. 그런 저희 부부에 대한 시어머니의 배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좁은 단칸방 신혼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희 둘이서 외출하려던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고, 낯설어서 빽빽 울어대는 세 살배기 조카를 돌보느라 비지땀을 흘리곤 했지요.




저는 그때부터 셋째 조카가 싫었습니다. 제가 시어머니에게는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힘없는 아이를 미워한 것이지요. 저는 아이와 마주 보고 눈도 맞추기 싫었어요. 그리고 또 제 마음이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되어서 아이는 저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었습니다. 제 남편은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업고 나가서 골목과 시장, 큰길 등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셋째 조카와의 악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악연은 우리나라가 강력하게 추진했던1980년대의 가족계획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구 문제는 제 생애 동안 경험한 것만 보아도 단기간에 큰 변화를 거쳤지요. 우리나라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1960년대부터 가족계획(산아 제한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과가 미미하자 1970년대부터는 둘만 낳는 집안에 각종 혜택을 주는 것으로 전향했지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며 가족계획을 권장한 것이에요. 그래도 인구가 줄지 않자, 결국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고 홍보하며, 매우 강력한 전략으로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이를 낳을 때부터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했습니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셋째부터는 출산에 따른 병원비를 의료보험수가가 아닌 일반 의료수가를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또 월급여에 포함하여 지급하는 가족수당과 학비 지원도 셋째부터는 제외 대상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시어머니는 공무원인 큰 아들이 산아 제한 정책 때문에 승진 제한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어느 날부터 시어머니는 셋째 조카를 저희 부부 호적에 양녀로 올리라고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저희에게 호적만 빌리는 것이니 다른 걱정은 말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요.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끈질기게 저를 설득하려고 했어요. 저는 시어머니의 말에 웬만한 것은 따르고 참아 넘겼지만, 제 아이가 생기기도 전에 조카를 양녀로 호적에 올리는 일은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끝까지 반대하자 시어머니는 몹시 서운해했지요. 그리고 저는 셋째 조카를 예뻐하면 끝내는 양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서 더 미워했습니다.


제가 미워했던 셋째 조카는 큰 형님네 딸로 잘 자랐습니다. 그 조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저는 그때의 상황을 말하고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제가 비열하게도 아무 잘못이 없는 아이를 미워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을 20년도 훨씬 지나서 떨어낼 수 있었지요.


이제 시어머니는 99살의 치매 2등급 환자입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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