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아침밥상 검열관이었어

by 전우주

저는 면사무소가 옆에 있던 시골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청이 있는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다행히 학교가 집에서 멀지 않아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이 있던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를 치르기 전까지 학교 근처에서 방을 얻어 친구와 함께 자취를 했지요. 시골에서 온 다른 친구들도 자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쩌다가 하숙하는 친구도 있었고, 친지 집에서 기거하는 친구도 있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를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 보내는 부모는 교육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들었지요. 도시로 유학 간 아이들 또한 집에서 다니는 도시 아이들에 비해 고생이 많았어요.


요즘은 제 아이들이나 가까운 지인의 아이들을 보면, 성인이 되어서도 밥은커녕 제 방 청소나 입을 옷도 못 챙기고 사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그것에 비하면 저희 세대는 참 대단했어요. 고등학생이면 열여섯 살인데,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가 오늘날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살림살이를 꾸려가며 학교에 다닌 것이지요.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시간 맞추어 갈고, 교복을 다림질하고, 도시락도 싸서 가져가야 했지요. 특히 고3 때는 점심과 저녁에 먹을 도시락을 두 개씩 싸야 했는데, 그런 것들을 다 해낸 거예요.



그리고 지방에서는 자녀를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비싼 주택 임대료와 생활비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서도 서울로 대학을 간 친구가 많지 않았어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거나, 부모가 아주 부자이거나, 믿고 의탁할 데가 있지 않고서는 쉽게 서울 유학을 꿈꿀 수 없었지요.


제 동생들은 저희 집에서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동생들은 저를 의지하여 망설이지 않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지요. 저는 동생들이 저희 집에 와 있다는 이유로 친정에서 반찬과 식량은 물론 경제적인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동생들은 손님이나 군식구가 아니었지요. 제가 바쁠 때는 빨래, 청소, 식사 준비, 아이 돌보기까지 함께 해주어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은 측면도 있었지요. 또한 제가 동생들에게 밥이나 빨래를 따로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하는 서로 불편하지 않은 사이였고요.


그런가 하면 시집 식구는 왠지 좀 어려웠지요. 시집 식구 중에도 저희 집에서 장기간 기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던 큰 형님네 딸과 막내 시동생이었지요. 그중 막내 시동생은 20년 전에 충청북도 증평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본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지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어요. 그때 시동생은 지방에 집을 두고 있어서 당장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았지요. 공무원인 막내 동서가 그해 연말에 발령받아 올라올 예정이어서 막내 시동생은 그때까지 고시원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형들이 둘이나 서울에 살고 있는데 고시원이라니! 여기서 나랑 같이 먹고 자고 하면 된다."


시어머니는 저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막내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결혼했을 때, 하마터면 대학생이 된 막내 시동생과 함께 살 뻔했지요. 시어머니는 제가 방 두 개짜리 신혼집을 선택할 경우 막내 시동생을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것도 남편이 주말에만 오는 새 며느리인 저에게 말이지요. 하지만 그때, 제가 단칸방을 신혼집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함께 살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런데, 결국 아이 셋을 둔 가장이 된 막내 시동생과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막내 시동생이 털털한 성격에다 입맛도 소탈해서 함께 사는 것이 편하지는 않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내 시동생은 직장까지 거리가 멀어서 저희 집에서 가장 먼저 밥을 먹고 나가야 했어요. 그때 저희 집 아침식사 차례는 1차는 막내 시동생, 남편이 2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먹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출근 준비와 아이들 등교 준비로 바쁜 아침에 밥상을 세 번 차려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제가 막내 시동생의 밥상을 차려주면 시어머니가 어김없이 주방으로 나와서 식탁을 검열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큰 문제였지요. 저는 너무나 불쾌해서 남편에게 말했지요. 시어머니가 아침밥상 검열하는 것을 못하게 하라고요.


그러자 다음날부터 시어머니는 안 보는 척하면서 식탁을 재빨리 훑어보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시어머니가 종종 식탁과 저를 훔치듯이 번갈아 흘끗거리던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것은 오히려 대놓고 식탁을 검열하는 것보다 더 싫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막내 시동생에게 시어머니를 말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막내 시동생도 이미 그걸 알아채고 저 모르는 사이에 시어머니에게 여러 번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식탁 검열을 멈추지 않는다면 막내 시동생에게 아침밥을 주지 않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아침 식탁 검열은 멈추지 않았지요. 끝내는 어느 날 제가 직접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막내 서방님이 우리 집에 와 있는 것이 불편한데도, 다른 데 가 있으면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참고 지내는 거예요. 그런데 아침마다 어머니가 '내 아들한테 밥은 잘 차려줬나' 하고 검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요. 어머니가 계속 그러시면, 저는 막내 서방님 아침밥 안 차려줄 거예요."


그 후로 시어머니가 조심하고 덜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막내 시동생이 저희 집을 떠날 때까지 7개월 동안 시어머니는 아침밥상 검열을 아주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이토록 제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유난스럽고 지독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편익 앞에서는 상대를 가리지 않았고, 눈치도 안 보고, 몰상식에 몰염치함까지 불사했지요. 그러나 그 유난스럽고 지독한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며느리의 인내와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것들 때문에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며느리들의 강력한 반발과 반목의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제 시어머니는 99살의 치매 2등급 환자입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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