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밥 먹고 살 줄 몰랐다

by 전우주

저는 시어머니로부터 ‘미안하다, 내가 너를 서운하게 했구나, 네가 힘들었겠다, 앞으로는 조심하마’ 등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저에게 사과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지요. 시어머니는 가족 관계에서는 사과나 용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시어머니 생각에는 남도 아닌 가족끼리 무슨 사과가 필요하고, 용서가 소용되냐는 것이었겠지요. 가족으로 살면서 서로 사는 걸 들여다보면 속속들이 다 알게 되고, 그러면 가족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 다 이해해야 한다는 시어머니 식의 가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2008년 3월에 갑상선암을 수술하고, 4월에는 방사성동위원소(요오드) 치료를 준비하는 저요오드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요오드식 과정이 수술 때보다 오히려 아프고 힘들어서 저는 날이 갈수록 지쳐가고 있었지요. 그때, 시어머니는 저에게 할인판매하는 돼지고기를 사다 준다고 했다가 소고기만 먹어야 한다는 말에 ‘암에는 이것이 좋다더라’면서 브로콜리 두 개를 사다 주었습니다. 그것도 비닐봉지에 든 브로콜리를 제가 앉아 있는 식탁에 던졌어요. 저는 시어머니가 던진 천 원짜리 브로콜리 두 개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았지요. 왜냐하면, 저보다 먼저 막내 시동생이 복강경으로 충수염 수술을 했는데, 시어머니는 수술한 사람에게는 개고기가 최고라며 시골에서 개 한 마리를 사다가 주었거든요. 그것도 약으로 먹는 것은 나누면 안 된다고 막내아들 혼자만 먹게 했지요.


저는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브로콜리 두 개와 개 한 마리는 갑상선암과 맹장염의 병상 비중 못지않게 그 차이가 크지요. 시어머니가 브로콜리 두 개를 제 식탁에 던진 날, 그동안 시어머니가 저에게 했던 불편함과 부당함이 분노로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어머니에게 더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했지요. 아마 시어머니는 처음에 저희와 합가 할 때, 저희 집 말고는 오라는 데가 없었음을 알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브로콜리를 던진 직후, 시어머니는 여기저기 아들들에게 전화해서 그 집으로 가도 되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역시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을 것이고요.


그래서 그랬는지 다음 날, 시어머니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어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크게 선심을 써서 생각하면, 시어머니로서는 제게 사과의 말을 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제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저는 시어머니가 제게 한 말이 사과하는 말인지 부탁하는 말인지 구별이 안 되었지만요.


“야야, 내가 네 밥 먹고 살 줄 몰랐다. 그래도 다른 데로 가라는 말은 하지 마라.”


시어머니가 처음부터 저를 만만하게 보았거나 편하게 여긴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시어머니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에게 한 질문이 그것을 짐작하게 하지요.


“대학은 나왔소? 우리 집 며느리들은 다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다고? 우리 큰며느리 친정아버지는 대학 교수고, 다른 사돈은 공무원이라오."


제가 초등학교 교사인 것을 알고도 시어머니가 그렇게 질문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큰 시아주버니의 친구 중에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원 양성소에서 단기 교육을 받은 다음에 초등학교 교사가 된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다른 며느리들의 학력과 친정 부모를 비교하여 제가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의미의 말을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가 할 필요는 없었지요. 혹시 제가 그동안 시집에서는 없었던 맞벌이하는 며느리라서 일찌감치 기를 꺾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편 시어머니의 또 다른 계산으로는, 먼저 결혼한 두 아들에 비해 저희 부부의 소득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매우 뿌듯했던 것 같아요. 제 남편은 결혼 전달까지 월급봉투를 시어머니에게 고스란히 갖다주고 다시 용돈을 타서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결혼하고 나서 제 남편이 월급봉투를 저에게 갖다 주자, 시어머니가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시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아들의 월급봉투를 차지할 수 있기를 기대했는지 모를 일이지요. 시어머니 생각에 저희는 월급봉투가 매달 두 개나 꼬박꼬박 꽂히는 집이었을 테니까요. 또 어쩌면 시어머니는 아들 중 제일 순하고 착한 제 남편의 월급에 대해 당연한 사용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시어머니는 결혼 후 첫 달부터 온갖 명목으로 저에게 돈을 받아 갔습니다.



제가 결혼했을 때까지도 월급을 현금으로 봉투에 담아 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가 월급봉투를 받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저희 집에 찾아왔지요. 그리고, 돈이 없어서 비료를 못 뿌렸더니 우리 논바닥만 벼가 누렇게 떴다, 농약값이 없어서 농약을 안 쳤더니 우리 고추만 병들어 김장도 못하게 생겼다, 막내 등록금이 모자라서 소를 팔아야 하는데 소가 없으면 농사짓는 것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다섯째가 면접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데 양복 사 입힐 돈이 없다, 막내 혼사를 앞두고 신혼집과 신부 패물을 해줄 돈이 없어서 잠이 안 온다 등등 시집의 절박한 사정은 시어머니 입을 통해서 제 월급날마다 끊임없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시어머니에게 제 월급을 갈취당하고 나면, 제가 남편에게 싸움을 걸었던 일이 아픈 기억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지요. 언젠가 제가 시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동네에서 제일 부자라고 자랑하셨잖아요? 그렇게 궁핍하지 않았으면서 왜 제 월급날마다 와서 돈을 달라고 하셨어요?"

"야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간 날이 네 월급날이었나 보다. 나는 지금도 네 월급날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언제 너한테 십 원 한 장 달라고 했냐? 다 네가 알아서 챙겨 주었잖냐?"


시어머니는 시치미를 뚝 잡아뗐지요. 시어머니는 늘 그런 식으로 말했어요. 그리고 나이 들어 깜빡깜빡하는 사람에게 지나간 일을 묻는 게 아니라고 입막음했고요.


저도 살아가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마음도 달라졌지요. 시어머니가 저에게 한 일을 꼭 사과받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어머니에게 복수라도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픈 고부 관계의 청산은 오롯이 제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는 귀(耳)가 순(順)해져서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 예순 살을 넘겼으니 품격 있고 아름답게 정리해야겠지요.


이제 시어머니는 99살의 치매 2등급 환자입니다.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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