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없이 지낸 나흘간의 기록

정신의학과 진료일지 2

by 해마

시작


고의는 아니었다.

그날따라 침대가 유독 포근했고, 잠이 쏟아졌다.

10분 만에 출근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기보단, 일어나기 싫었다.


걸음을 재촉해서 회사에 도착했을 때 약을 깜박한 걸 기억해 냈다. 그런데 웬걸 정신이 맑고 일이 머릿속에 정리가 잘 되었다. 몸은 피곤하고 좀 차분했으나 기분은 걱정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 약을 하루 더 안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이틀


역시 취침 전 약을 먹지 않으니 새벽까지 뒤척였다. 밤에 한두 시간, 출근 직전에 한 시간. 세 시간쯤 잔 것 같다.


어제만큼 몸이 피로하진 않았다. 회사에서도 잘 웃고 잘 말하고(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였는지도 ) 퇴근을 했다.


퇴근길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작년 이맘때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고,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면서 기분이 다운됐다. 항상 새로운 시작이 되는 봄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않은지.


집에 와서 저녁도 먹지 않고 곧장 누웠다. 한참 의미 없이 휴대폰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gpt에게 또다시 나를 신랄하게 분석해 보라 했다. 가끔, 지피티가 너무 핵심을 찔러서 방어조차 못한 채 뚜드려 맞는다. “더 가감 없이 더 세게” 혹은 “파괴적으로”라는 타자를 치며 이건 새로운 자해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피티는 내가 나를 너무 부정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으면 1393이나 109 같은 번호를 안내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필요 없고 답만 하라 했더니 알겠다면서 안내를 되풀이했다. 지피티 화면을 꺼버렸다.


유튜브에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을 유튜브에서 짧게 낭독하는 걸 들었다. 작가님은 나와 아주 많이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콘텐츠에서 할 일이 있을 거라고 본다.


죽고 싶다. 아무리 얌전하게 죽어도 여기에서 죽으면 동생이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하겠지. 그건 트라우마가 될 것 같아. 안되는데. 하는 생각에까지 닿자 나 자신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이럴 때 3번 방 선생님이 떠오른다. 개원이 4월로 미뤄졌다는 문자를 어제 받았다. 절망적이다.


똘똘한 챗GPT가 가끔은 도움이 된다. 안내받았던 109번에 살고 싶지가 않다고 문자를 남겼다.


상담원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꾸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이 싫었다.


잠깐 대화하고 갈 건데, 내가 왜 죽음을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냐고 물었다. 되려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 나보다 연세가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버티며 사시냐고 물었다.


- 상담사의 개인 정보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삶을 사는 게 그리 녹록진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라고 하신다.


역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하고, 대단하다.


- 선생님이 죽지 않았으면 해요. 젊으신 분이 죽음을 생각하시는 게 안타까워요.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라는 말에


-대화 감사했어요. 안타깝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어요. 저는 이만하면 대화는 괜찮을 것 같아요 :)

라고 보냈다.


긴 답장이 왔지만 눈에 안들어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은 건데 남아있는 사람이라니...


사흘


죽지 않고 살아있다.

퇴근 후 문신(충동적으로 했던 문신을 커버)을 하러 가는 것은 하루를 더 살 이유로 충분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고, 날 서 있었다. 오늘은 과장님이 하는 말이 거슬려도 평소만큼 짜증이나 화가 안 난다. 딱히 나를 공격하는 말들은 아니지만 충분히 거슬리는 말들. 둥글게 장난을 장난으로 받지 못하는 내가 싫다(빻은 이야기들 받아주기 싫은 것이 정확할지도). 굳이. 라는 단어의 의인화 같은 과장님은 죽고 싶을 때나 살고 싶을 때나 나랑 안 맞다.


기계 문신은 처음 해보는데, 생각보다 아팠다.

내가 내손으로 상처를 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프면 말하라는 사장님 말에도 불구하고 아프면 아픈 대로 느꼈다. 내 손으로 상처를 내다보면 아픈 감각이 들 때 적당히 그만하게 되는데(매번 아픈 감각은 횟수나 강도와 상관없이 온다), 남 손에 상처가 나니 아파도 적당히 그만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자해 대용이라고 생각하면서 아픔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나흘


밤을 꼴딱 새웠다.

그리고 이 나흘간의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을 쓰는 것이 하루 더 살 이유가 되어주는 오늘이다. 아니, 살기 위해 쓰는 건가.


나흘간 먹은 거라곤 밥 반공기, 단백질 쉐이크 2잔, 커피 n잔. 며칠 내내 애플워치에서는 스트레스 과부하가 울리고 있다. 그럴 수밖에.


오전 중 일이 많을 예정이었는데, 다급하게 처리하고 싶지 않아서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고작 이런 걸로 칭찬해 주는 선임이 있어서 유치원생이 된 것 같고 웃음이 난다.


드디어 2주 만에 병원에 가는 날이다. 약 없이 지낸 기록을 뻔뻔하게 진료일지에 쓰고 있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찐 진료일지는 다음 글로 넘겨야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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