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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음 Jun 16. 2023

비 오는 날-아주 사소한 선택

인생극장을 아시는가?

 (bgm 깔아주시고~ ♬)따단따 따단따 따단따 딴따다다~ ‘그래 결심했어!’, ‘이휘재의 인생극장’을 아는가? 이휘재 배우분은 매화마다 복잡한 상황 속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당연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180도로 달라진다. 어린 시절 이 프로그램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봤었다. 최근까지도 가끔 애매한 선택의 순간마다 인생 드라마 속 장면이 그려지곤 한다. 그 날 역시 그랬다.      




 글쓰기 수업 후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근처 역을 빠져나오며 시계를 들여다본 순간 자정이 막 지났음을 알게 되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는 차가 없는 홀가분함이 퍽 좋았었다. 그런데 집에 갈 생각에 차가 간절히 필요해지는 걸 보면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도착인데, 설마 버스가 끊긴 것은 아니겠지?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보슬보슬 내리고 내 안에서는 초조함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차 시간표를 통해 운행하는 버스 2대가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버스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내 앞에 멈춰 섰다. 버스 안 적당한 좌석 위로 몸을 걸친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결코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잠이라는 불청객의 갑작스런 들이닥침 탓인지 차창에 그려지는 빗줄기의 토닥거림 탓인지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튼 시야가 조금씩 깜박깜박해졌다. 잠깐 꿈뻑꿈뻑 졸았음에 분명하다. 문득 차창 밖으로 눈을 돌리다 ‘00초등학교’ 글씨를 얼핏 보았다. 다행히도 닫히는 버스 문을 간신히 비집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지나칠 뻔 했네!’ 하는 안도감으로 주위를 살폈는데...... 이런! 절대 정류장 이름을 잘못 본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정류장에 씌여있던 글씨의 위치였다. 하필 가운데가 아닌 오른편에 작게 적혀 있던 글씨를 볼 게 뭐람. 그렇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많은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 4가지의 선택지는 다소 많게 느껴졌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 정거장을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카카오택시를 불러 타고 갈 수도 있겠다. 연락이 없으니 자고 있을 것이 뻔하지만 남편을 깨우는 것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버스 한 대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는 방법이 남아 있다. 그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인지했다. 멀리서 희미하게 음악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집까지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기다리는 이가 있는 것도, 자고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다. 고로 매우 사소한 선택이다. 뭐로 가든 집으로만 가면 되는 일 아니던가. 근데 이게 뭐라고 꽤나 깊은 고민이 되었다. 주적주적 내리는 비 때문일까, 아니면 살짝 오르는 취기 때문일까? 이번에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원래 그다지 결정을 주저하는 편은 아닌데 오늘따라 나답지 않다.  




 걷기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기에 분명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비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니 우산이라도 있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해맑게 맞기에는 다소 굵어져 있던 빗줄기로 인해 망설이게 되었다. ‘저녁 먹다 육개장에 들어갔다 나와 붉게 염색된 머리카락 여러 가닥을 빗줄기로 샤워시킬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잠깐 스쳤다. 그렇지만 이내 그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산성비는 건강에 해롭다’라는 흔하디흔한 과학적 상식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카오 택시 앱을 열어보기 위해 주섬주섬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늦은 밤 청라에서 택시 잡는 일은 쉽지 않다’라고 읊조리던 지인의 말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귀가 얇아진 나는 휴대폰을 슬며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면 집에 전화를 해? 일단 남편이 잠결에 전화를 받을까 그것부터 미지수였다. 통화에 성공하더라도 워낙 잠에 목을 메는 사람임을 잘 알기에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쯤되면 역시 한 가지 방법 밖에는 남지 않는다. 


♬따단따 따단따 따단따 딴따다다~ ‘그래, 결심했어. 막차를 타는거야!‘ 


고개를 들어 확인한 순간 안내 전광판이 ‘10분 후 도착’을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비 내리는 소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기에 기다림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비가 올 때면 일부러 카페에 찾아가는 나이다. 창가에 앉아 내리는 비를 풍경 삼고 빗소리를 음악 삼아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다. 이런 나에게 10분이라는 시간은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타닥타닥 톡톡. 너무 시끄럽지도, 숨 막히게 고요하지도 않은 적당한 경쾌함이었다. 차도,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아 적막해 보이던 거리를 채워줄 만큼의 적당한 생기였다. 주중의 분주함과 학급의 속상한 일을 씻겨내 줄 정도의 적당한 촉촉함이었다. 비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1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나보다. 빗속을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버스가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했다. ‘어, 벌써 왔네. 더 늦게 오지’ 살짝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비로 인해 잠시나마 힐링할 수 있어 참 좋았다. 굉장히 사소했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보기를 골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내음의 인생극장’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그것 역시도 매우 소소할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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