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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음 Jun 18. 2023

술을 대하는 나의 자세

멀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술과 여러모로 가깝다. 지인 중 애주가가 많음은 물론 술자리에 가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최근에 음주를 주요 소재로 한 드라마와 책을 재밌게 봤을 정도로 거부감도 전혀 없다. 그렇지만 결코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나에게는 술을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내 아버지는 거의 매일 취해 있었다. 그리고 종종 만취 상태로 어머니와 목소리를 높여 싸우곤 했다. 꽁꽁 묻어둔 나의 기억의 페이지 속에는 술 마시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 꼭지가 돌아 집안 물건들을 마구 집어 던지던 아버지, 와장창 깨지고 부숴진 물건들 너머로 숨죽인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술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하던, ‘가시내야. 너도 필요 없으니 나가’ 라는 말은 지금도 깊이 박힌 채 뽑히지 않은 가슴 속 가시이다. 이렇다 보니 20대 때의 나에게 있어 ‘술 안 좋아하는 남자’가 이상형 1순위였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에는 술을 몹시 즐기는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술안줏거리를 고이 품고 집으로 배송된 흰 스티로폼 박스를 받아들 때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다. 금요일마다 ‘이번 한 주도 고생했어’ 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로에게 내뱉으며 술잔을 기울인다(물론 금요일에만 술을 마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혼술을 할 때면 먹방 유튜버를 친구 삼아 태블릿 PC 화면에다 ‘짠’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해 내는 남자,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에 비하면 남편의 주사는 매우 양호하다. 가래가 심하게 끓는다며 침을 자주 뱉는 것은 꽤 눈에 거슬리지만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의미 없이 박수를 쳐대는 것 쯤은 봐줄 만하다. 하지만 마냥 곱게 넘길 수 만은 없는 것이 있으니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침대에서 오전 시간을 다 써버리는 남편의 주말 패턴이다. 추가로 핸드폰 액정 파손, 물건 분실 등의 소소하지만 짜증나는 실수들까지 있다 보니 어찌 남편을 너그럽게 대할 수가 있겠는가. 




 부글부글 끓는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의외로 우리 시어머니이다. 어머님께서 우리 부부의 결혼 10주년을 맞아 써주신 편지에는 ‘술 좋아하는 신랑 뒷바라지하느라 애쓴다’ 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또한 ‘친정 아버지도 술 좋아하는데 남편까지 그래서 어쩌니’라며 내 손을 부여잡고 말씀하신 일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였던가, 철없는 며느리는 어머님 걱정하실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독에 빠진 아들의 행태를 조르르 일러대곤 한다. ‘네가 바가지 좀 긁어라’ 혹은 ‘내쫓아 버려’ 라는 사이다와도 같은 말씀들을 기대하면서.     



  최근까지 남편은 나를 ‘술을 싫어할 뿐 아니라 잘 마시지 못하는 여자’로 오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눈치 없는 남편이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는 내 말을 ‘마시지 못한다’ 로 잘못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 금세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게 된 까닭에 술을 마실 여건이 안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는 된다. 어찌됐건 나는 기특하게도 12년의 금주를 일궈냈고 남편의 잘못된 믿음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런 나의 오랜 금주를 봉인 해제시킨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3년 전 직장에서 만난 언니 두 명이다. 언니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마음에 술자리를 종종 함께하며 다시금 술을 입에 대게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싫어하던 술에 굴복당하고 싶지 않아서, ‘술 취하지 말라’ 는 성경 말씀을 어기고 싶지 않아서 꽤 몸을 사려야만 했다. 덕분에 찐하게 술잔이 오고 간 회식 후에도 항상 말짱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둔할 뿐 아니라 신생아처럼 일찍 잠자리에 드는 남편이다 보니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계기로 술을 마신다는 것을 남편에게 이실직고하게 되었다. 남편은 한동안 충격에 빠진 듯 보여서 살짝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요즘 남편은 ‘내음이가 알고 보니 술을 잘 마신다’며 사람들에게 떠벌릴 뿐 아니라 혼술 자리에 은근히 나를 끼우려는 시도 중에 있다.  




 술을 좋아하는 지인들은 음주에 능한 와이프를 옆에 두고도 혼술하는 남편이 안쓰럽다고 말한다.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사이가 더 돈독해질 것이라는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조언에 흔들리지 않는다. 술이라는 광폭한 놈이 아버지와 남편을 거쳐 내 삶에 무단침입하고 현재까지 불법점거 중인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온전한 내 의지로 그놈에게 곁을 내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밖에서만 잠깐씩 만나고 언제든 원하면 헤어질 수 있는 쿨한 관계 정도로 거리를 둘 것이다. 하루하루 알코올로 인해 총기가 흐려지고 있는 통풍 환자인 남편을 향한 내조라고 봐도 좋다. 남편은 나마저 함께 해준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버려 음주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채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에브리데이 술’이라면 부부 금실은 좋아질지 몰라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 뻔하기에 자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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