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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벨라 Sep 28. 2022

캘리포니아에서 부동산을 하면서 (5)

희망찬 날

월요일 아침은 얼마 전부터 기다려왔던 아침이었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에서 도착한 두 꼬마들과 그들의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로 등록하러 가는 날이었다.


저절로 미국에 도착한 날부터 첫 등교하던 때가 떠 올랐다. 1973년이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날은 4월 초 화창한 날이었다. 도착한 날이 금요일이었고 주말을 넘기고 돌아온 월요일부터 학교엘 가기 시작했다. 어떠한 마음의 상태였는지 기억이 별로 없고, 첫 주말을 어떻게 보낸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짐작건대 영어도 할 줄 모르고 들어간 고등학교였으니 엄청나게 두려웠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니 이 년쯤 미리 오셔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마중 나오셨다. 짐을 찾은 후, 아버지는 곧 딸 셋을 데리고 산호세 (San Jose)를 향해 운전하셨다. 큰언니는 앞 좌석에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것으로 기억되고 나는 창박을 내다보며 우뚝 우뚝 솟은 빌딩은 왜 안보일까 생각했다. 안 보여 실망하였고, 한참 뒤에 도착한 산호세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엔 침대도 전등도 없어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일 센트, 오 센트, 십 센트, 이십오 센트짜리 동전을 예쁜 유리병에서 주르륵 바닥에 부우 신 후, 오 센트와 십 센트의 신기함에 대해 알려주셨다. 십 센트 동전이 오 센트의 것보다 크기가 작다는 사실은 그 당시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그리도 예뻐 보였던 투명한 유리병은 나중에서야 한국 마켓에서 파는 김치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도착한 곳이 산조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산호세라는 것도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월요일 날 학교에 도착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고등학교 1학년생이  되었다.


그때가 별로 오래전 같지 않은데 이제는 이민선배가 되어 설레는 마음의 한 식구들을 동행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엘 다녀온 것이다.


초등학교 등록은 너무 간단히 끝냈다. 등록이 된 아이를 데리고 4학년 교실을 향해 걸어가면서 남자아이는 하나도 안 무섭다며 누나와 어른들에게 안심을 주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담임선생님이 요란스럽게 반겨 주었다. 두 꼬마들은  무슨 일이 터졌는가 싶을 정도의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얼마나 놀라웠을까 싶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 되어 줄을 서서 운동장으로 나가는 학생들 맨 뒤에 담임션생님은 꼬마를 세웠다. 그러한 아들을 보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안쓰러움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 모습도 놓칠 수 없었다.


꼬마를 학교 운동장에 다른 아이들 속에 둔 체 일행은 중학교를 향해 떠났다.


중학교에서는 좀 달랐다. 입학서류를 하고 나니 카운슬러가 2,3 시간 외출해야 한다며 화요일부터 학교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잔뜩 긴장해  있던 딸아이는,


“가슴이 두근거려”

“어떻게 하루를 더 참을 수 있어?” 한다.


돌아 나오는 우리 일행 속에서 딸아이는,


“엄마, 나 겁나”


엄마의 팔목을 잡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배움의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사과향기의 총명함과 행복함이 화려하게 풍겨왔다.


훗날 그들은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어리둥절하던 그때를 기억할 수 없으면서도 할 수 있듯이 그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들은 이날이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희망찬 날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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