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사람
노트북 타자 소리가 지붕에 부닥쳐 튀어 오르는 빗줄기처럼 적막을 채웠다. 수영은 노트북 오른편에 올려둔 1,100원짜리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편의점 캔 커피를 집었다. 커피 향만 남아 반쯤 줄어든 커피가 손 안에서 미지근한 온도로 찰랑거렸다. 쌉싸름하고 맹맹한 우유 맛이 짙게 났다. 화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어서 뻑적지근한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까만 테두리에 사각 뿔테 안경을 벗어 올려두었다.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글의 질적인 완성도는 확연히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어디에서 나온 여유란 말인가. 누군가를 도울 상황이 아니며 쪼갤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온몸으로 부딪치는 사람의 절박함에 천성적으로 나약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이런 한가로움이라니,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이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수영은 혜경의 죽음으로 줄곧 경준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장례식에서 가슴을 쥐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경준의 모습을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자신으로 비롯된 일이 아님에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일이었다. 경준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혜경은 그가 영영 안고 갈 죄책감이었다. 어쩌면 해영이 경준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부터 예정된 조우였다. 정각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영은 긴장으로 굳은 팔을 깍지를 껴 위로 쭉 뻗었다. 팔꿈치부터 시큰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괜히 챙겨 온 자료를 뒤적이며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수영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그림자가 문 앞에 멈춰 섰다. 적당한 속도의 두드림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섬세했다. 들어오세요. 수영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소리 높여 말했다. 달칵, 문고리를 내리누르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굳게 다문 해영이 들어왔다. 하얗게 보풀이 인 옷은 후줄근했으나 전체적인 매무새는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수영은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마주 인사하려다 말고, 무표정에서도 어렴풋한 긴장이 비치던 낯에 커다란 균열이 일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공포와 그간의 학습된 무기력이 드러났다. 수영의 얼굴에서도 천천히 웃음이 가셨다. 수영은 몇 걸음 물러난 해영의 눈동자 속에 선명한 혼란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침묵에 익숙해진 해영이 놀라지 않도록 느리고 낮은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수영의 얼굴은 많은 것을 짐작한 듯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형제입니다. 더딘 걸음으로 수영의 앞자리에 앉은 해영이 기도하듯 모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영은 해영의 붉은 손 위로 푸르게 돋은 핏줄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안경을 집어 들었다. 연이 끊긴 것은 아니지만 워낙 자유로운 사람이라서요. 연락이 닿은 지 오래돼서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압축해도 두꺼운 안경알을 감싼 두께감 있는 안경테가 해영의 투영을 멈췄다. 수영은 말을 보태려다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적합하지 않은 사과나 해명은 도움을 청한 사람과 부채감에 나온 사람 모두에게 무엇도 되지 못한다. 결론도 의도도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을 때 끝을 맺은 말을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었는지 수영이 입을 달싹거렸다.
고맙습니다.
해영이 먼저 운을 뗐다. 모든 말에 우선한, 수영의 배려에 대한 감사였다.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 차가운 공기에 코가 시려 콧대를 집게손가락으로 주물렀다. 머리카락 사이로 맺혔던 땀은 서늘한 에어컨 바람에 말라 사라졌다.
그렇지만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니까요.
제가 진 빚은 아니지만, 해영은 뒷말을 삼켰다. 확실히 수영은 강 씨를 닮았다. 뻗치지 않고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나 짙은 눈썹, 햇볕이 깃드는 순간 새까만 동공과 투명하게 비치는 겁에 질린 인영마저 선명해지는 다갈색 눈동자 같은 것들을. 수영을 보며 강 씨를 투영하고, 두려움을 넘어 불편함을 느꼈으나 이런 순간마다 부연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을 수영을 생각하면 곧바로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마주한 눈동자는 분노도 적의도 희미한 답답함도 품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움이 연갈색으로 채워졌다. 해영도 알고 있었다. 수영은 강 씨와 다르다.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도, 분명한 방향을 알면서도 용인하고 있다는 것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일 수도,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무의식이 가족을 배제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은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까. 해영은 답을 알면서도 내지 못했다. 수긍할 수만은 없는 일을 수긍하는 것,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오래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그 안에서 벌어진 감정의 소용돌이는 온전히 자신의 몫인, 태어나기로 한 뿌리이지만 두 줄기로 갈라진 등나무처럼. 수영은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가족이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많은 짐을 계속 지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남들보다 빨리 안 것이다. 해영은 그것을 알기에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과 형을 한 울타리 안에 가두는 수영을 이해했다.
이런 말이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빚이 있습니다. 형에게는 말하지 않았고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동생에게 빚이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어차피 갚으면 끝나는 일이니까요.
해영은 가만히 수영을 마주 봤다. 수영의 얼굴은 조금 조급했고 해영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해영은 침묵했다. 사채도 용서도 수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해영이 고개만 살짝 흔들자 수영은 첨언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바쁘실 텐데, 괜한 얘기로 시간을 끌었네요.
수영은 늘어놓은 반투명 파일을 취합해 고른 묶음이 되도록 책상에 두어 번 치고 건넸다. 처음 보는 제약 회사 이름과 새롭게 출시된 약에 대한 긴 설명이 큰 글꼴로 쓰인 데다 하얗게 손톱 모양의 자국이 전반에 흩뿌려져 안에 내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해영은 가장 위에 두꺼운 글꼴로 ‘연쇄 자살’이라는 글씨를 어렴풋하게 보고 파일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요괴에 대해 물어보셨지만,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혜경을 포함한 다섯 명이 숲에 갔으나 요괴는커녕 길을 잃고 헤매기만 했다고, 그러다 발견한 못을 들여다보던 혜경이 갑자기 뛰어들었다고, 경찰에 신고해서 겨우 수습했다고 보탰다. 그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눈앞에서 본 갑작스러운 자살과 다른 가능성을 지워버린 사건의 종결은 동호회의 와해와 해체를 가져왔다. 눈을 마주치면 웃고 숨을 나누던 한 생의 멎음은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충격이란 것을 해영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해영은 혜경의 죽음에 집중했다. 나이아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해원의 죽음과 유사할 테니까. 못 위에 투영하는 것이 그리움이라고 했던가. 혜경이 본 그리움은 무엇일까, 해원이 돌려받으러 간 것은 무엇인가. 물을 오래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한 이유가 정말 고작 그 이유란 말인가. 해영은 일순간 사무치는 허무를 느꼈다. 흘러간 것에 미련을 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어코 생을 던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제든 별거 아닌 일로 아득바득 살아온 생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건 힘껏 달리는 이유를 돌아보게 했다. 나이아의 말은 믿을 수 있는가, 불가사의한 일에 매달리는 것이 맞을까. 왜 늘 어딘가로 내달리기만 할까.
언제나 어떤 선택을 하도록 쫓기고 몰리며 기나긴 트랙을 달리고 있었다. 그 위에는 느닷없이 사라진 부모가 있었고,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해 미래를 그리지 않았던 해원이 있었고,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강 씨가 있었다. 그래도 계속 달렸다. 그리고 나이아를 만났다. 나이아는 트랙을 밟고 있지 않았다. 여자는 폭풍의 눈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여자가 서 있는 곳은 분명 지면이었으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선 트랙을 벗어나야 했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을 앞지르려면,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에게 추월당하지 않으려면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달려야 하는데,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흘러갔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여자를 따라 돌아보게 되었다. 바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을 보고 다급해졌고 선에 걸쳐 엉망진창으로 내딛는 걸음을 마주했지만 자꾸만 돌아봤다. 해영은 일상을 버려두고 비일상에 진입하려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에어컨 전원이 꺼진 소리와 잔잔하게 떨리는 수영의 목소리에 아득했던 눈을 깜빡이자 다시 트랙 위였다.
*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금일 오전 11시에 태산 공원의 호수 위로 두 구의 사체가……
해영은 뜨거운 국에서 하얗게 올라오는 김에 바람을 불며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바라봤다. ‘불법 고리대금업자 2명’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하단에 쓰여 있었다. 화면은 익숙한 호수의 전경을 비췄다. 해영은 숟가락을 든 채 멈추었다.
30대 남성 두 명, 자살 가능성, 숲이 아닌 호수에서 떠오른 사체, 고리대금업자……
멍하니 되뇌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허벅다리 위에서 진동했다. 양옆에서 눈초리를 느끼며 주머니 옆으로 헛손질하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끊고 연락받았다.
뉴스 봤어요?
낯선 목소리는 다급했고 떨렸으며 약간의 환희가 있었다. 허둥지둥 전화를 받은 해영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몇 년 전 우연히 번호를 교환했던 준형이었다. 과거, 강 씨가 유난히 차갑게 분노했던 날이 있었는데, 준형이 처자식과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했던 날이었다. 누군가에게 연락받은 뒤 부술 듯이 휴대폰을 쥔 강 씨의 얼굴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서늘함과 거세게 요동치는 분노로 가득했다.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지라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뉴스는 불법 조직의 비리로 화제가 전환되어 있었다.
해영 씨. 우리 돈 돌려받을 수 있대요.
준형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해영은 멍멍하게 앉아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피해자 연합이나 재판에 대해 말하는 준형의 말도 익사니 자살이니 지껄이는 보도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해영은 고요한 얼굴로 천천히 손을 떨구었다. 대답이 없는 해영을 기다리다 못한 준형이 연락을 끊자 텔레비전 소리가 선명해졌다.
해영은 두 사람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들은 소식처럼 몸이 굳고 정신이 흐려졌다. 그 여자의 짓이겠지.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 언어로 정리된 것뿐인데 생경했다. 왜 호수에서 발견된 걸까. 그들을 본 곳은 숲이었다. 이끼처럼 낀 물때와 잿빛으로 굳은 석상 같은 몸을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보았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은 것은 그들이 죽은 이유였는데, 숲에 있던 그들의 사체가 호수에서 발견됐다는 건 인위적인 개입에 확신을 불어넣었다. 해영은 팽팽하게 조임줄을 당긴 것처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날 숲에서 느꼈던 감정은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한 안도감이었다. 여자가 그들을 왜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숨이 트였다는 건 틀림없었다.
소원.
기억과 감정이 복잡하게 엉겨 붙은 해영의 머릿속에 여자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삶이 왜 자꾸만 좋게 흘러가는지, 달라진 것은 그 여자의 존재뿐인 비루한 삶에서 예측 불허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 여자의 개입 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해영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거라는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소원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했다.
혹여 강 씨에게 쫓기던 날,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까지 전부 소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단 한 번도 대가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그쳤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주춤거렸던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부채감이 들었다.
나이아. 해영은 희뿌연 국물이 맺혀 흐르는 숟가락을 아예 내려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도 그 여자의 목숨값일 소원. 숨에 비할 수 없는 하찮고 값싼 소원.
순간 이기적인 치기가 치켜들어 다리를 떨었다.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 인간이기 때문인지 박약한 탓인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약함을 앞세울 때마다 자꾸만 눈앞에 희뿌연 것이 왔다 갔다 하고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넓적다리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해 시선만 움직여 화면을 훑었다. 얼핏 보이는 건 메일 알림이었다. 글 보고 연락드립니다, 라는 말로 시작하는 메일이 화면의 상단에 떴다. 휴대폰 위로 쏟아진 전등 빛이 절묘하게 발신인을 가려 휴대폰을 비스듬하게 들어 올렸다.
다음 소식입니다. 전국에 국지성 호우가…… 처음으로 요괴를 목도한 사람이 있어요. 텔레비전 소리 너머 아득하게 희소의 말이 중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