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사람
소년은 동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거나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됐냐고 떼를 쓰지 않는다. 모친이 제 배에서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나왔을까 애정 어린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이맘때의 아이에겐 으레 읽어준다는 동화를 엮어 만든 ‘명작 동화선’ 제목의 책을 읽어줄 때, 팔랑거리며 책 모서리를 넘기는 인내심 있는 손끝과 사랑스럽게 올라가는 끝음절을 기대가 찬 동그란 눈동자로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속으로 무심하게 불만을 표한다. 종이가 우글거리고 찢겨서 제목이 잘 보이지도 않잖아. 이음새는 또 왜 이렇게 너저분하고. 어디서 자꾸 고물을 주워 오는 거야.
소년은 잔잔하고 다정해 보이려고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말의 나사를 헐겁게 풀고 조이기를 반복하는 모친을 동공만 움직여 흘겨보고 다리를 가위질하며 은근히 적당한 박자를 무의식에 새겨 준다. 9시가 되면 소년은 칼같이 잠자리에 든다. 8시 59분이 되는 것을 모친의 휴대전화 속 시계로 확인하고 속으로 초를 세며 이부자리를 핀다는 것은 모친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강박적으로 지키는 것은 잠자리뿐만이 아니었지만 소년에게 강박은 쫓김이나 부담이 아니라 내재한 본성과 비슷하다. 태어나기로 기민하고 영특하다는 걸 우주처럼 어둡고 넓은 아공간에 드문드문 별처럼 조각난 기억이 이어지는 순간의 앞머리부터,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초등학생이 되어 적당히 나뉜 무리 안에서 치고받고 수시로 일어나는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로 자연스레 굳어지게 되면서 당시 초임이었던 손 선생의 신임을 받는다. 손 선생은 허리에 셔링이 들어간 플라워 원피스를 자주 입었다. 반 아이들을 다독일 때나 여자애들의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당겨 장난이라며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짓궂은 남자아이를 붙들고 엄격하게 혼을 내는 모습은 중견 선생 같아 보이지만, 첫 수업 날 말을 버벅거리거나 성질 급한 아이의 행동에 말문이 막힐 때마다 십자가 모양대로 은색 큐빅이 박힌 은목걸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초임 교사의 모습이었다. 네가 성원이 도와줬다며, 소년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겸손처럼 보이는 위선을 떤다. 손 선생은 크게 감복한 얼굴로 그동안 반 친구들이 싸울 때 말리는 것도 선생님은 다 봤어, 어린아이의 어휘력 수준을 가늠하며 뜨뜻미지근한 칭찬으로 에두르지만 소년은 조금 더 구체적인 칭찬을 바라거나 불만을 솔직함으로 드러내 갈등을 일으킨 것도 저예요, 말하는 대신 어른스럽게 고개만 끄덕인다.
네가 성원이를 좀 챙겨줄래, 조심스럽게 꺼낸 물음에 주저 없이 네, 대답하며 빙긋빙긋 웃는 소년을 보고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의 손 선생은 이날 이후로 성선설을 굳게 믿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늘 인사하던 각도로 꾸벅 인사를 하고 교무실 문을 밀어 닫으며 작은 틈새로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뒤로한다.
성원은 지적 장애를 가졌다. 짓궂은 몇 아이들은 말을 더듬는 성원을 비웃지만 적극적으로 따돌림을 주도할 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느린 행동과 정처 없이 굴러가는 눈동자를 본 첫날부터 가까이하려 하지 않은 아이들은 속으로는 비웃거나 욕을 했을지언정 수군거리지 않는다. 성원의 자리는 고정되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유동적이었다. 손 선생은 구별 지어 대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어떤 형태로든 노력은 반드시 티가 나기 마련이다. 체육 시간,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주위만 맴도는 성원을 남자아이들의 친구 통과 의례와 같은 축구에 끼워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교무실에서 손 선생의 옆자리를 차지한 체육 선생 양 씨는 손 선생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수업 내내 무언가를 고뇌하는 눈치였는데, 4교시라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아이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유로 15분가량의 자유시간을 주었을 때 조용히 다가가 성원과도 함께 하고 싶다는 소년의 말이 정점을 찍어 급조된 팀에 얼떨결에 성원을 참여시켰다. 자유시간이라는 이름을 박탈한 줄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양 선생을 보던 승현이 슬쩍 빠졌다. 일곱 명은 은근히 좋아하고 여섯 명은 눈에 띄게 착잡해 보였다. 구령대와 스탠드에 두세 명씩 옹기종기 모여 조잘대는 여자애들 사이로 끼어든 승현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경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내기하자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성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
수진이 공을 빼앗아 반대편 골대 가까이 차자 연거푸 패스를 외치던 성원이 입을 다물고 공을 쫓아 달린다. 여섯 명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소리치거나 어느 위치로 가라고 지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여섯인 양,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축구에 참여하지 않았던 소년은 스탠드에 앉아 남자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노는 여자애들 무리와 깔깔 웃으며 대화하고 있는 승현의 신발을 곁눈질한다. 유행의 선두에 있는 브랜드의 신발은 하얀색 바탕에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로고가 옆면을 장식하고 있다. 신발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새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같은 투정은 할 수 없으니 나중을 기약한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승현의 신발주머니에는 늘 두 켤레가 있다. 고무로 된 장식 하나 없이도 가난의 티가 나지 않는 하얀 실내화와 야광으로 번쩍이는 축구화. 매 체육 시간에는 축구화로 갈아 신는데 오늘은 유명 브랜드의 운동화다. 빨았는지 버렸는지 깜빡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소년에게 중요한 것은 설원처럼 흰 운동화가 신고식이라는 우스운 이유로 밟혀도 속없이 웃고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하는 축구광임에도 축구를 빠진 것이 운동장이 모래와 먼지로 가득해 더러워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승현은 웃을 때 반달로 접히는 눈꼬리와 유쾌한 농담을 자주 하는 호감형의 얼굴로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소년은 공차는 소리만 경쾌하게 울리는 운동장을 슬쩍 바라보다 꽃망울처럼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도로 돌린 시선을 승현의 옆에 있는 소녀에게서 떼지 못한다.
날카롭게 잔잔함을 가르는 전자 호각 소리에 돌아본다. 성원에게 같이 하라고 등을 민 이후로 어딘가로 사라졌던 양 선생이 설렁설렁 걸어와 이제 모여라, 소리친다. 땀에 흠뻑 젖어 스탠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이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 공을 주워 걸어온다. 몸을 움직여 양 선생의 뒤로 건물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자 어느새 종이 칠 시간이 되었다. 스탠드 가장 밑 칸에 선 채 운동장에 일렬로 서라는 양 선생의 말에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쨍하고 날카로운 수진의 비명이 들린다. 멀리서 우두커니 서 있다 가장 늦게 걸음을 뗀 성원이 달려들어 수진에게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대비하고 말 것 없이 크게 궤적을 그린 주먹에 머리를 맞은 수진이 비틀거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머리를 쥔다. 놀라 스탠드를 박차고 뛰어나간 양 선생이 성원에게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얼굴로 소리치는 수진과 성원 사이를 가로막는다.
뭐 하냐 너?
수진이 커다란 몸으로 시야를 가리는 양 선생에게 붙잡힌 어깨를 뿌리치듯 떼어내며 몸을 비틀어 보이는 성원에게 눈을 부라린다. 타일러도 보고 소리치기도 하는 양 선생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성원도 지지 않고 버티고 서서 커다랗게 뜬 눈으로 수진을 노려보고 있다. 그만하라니까. 양 선생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자 그제야 입을 다문다.
말더듬이 주제에.
겨우 진정되나 싶더니 기어코 중얼거린 수진에 인내가 박살 난 양 선생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수진을 옷자락을 잡는다. 멀어지는 수진과 양 선생을 굳은 채 바라보던 아이들은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에 슬금슬금 건물로 들어간다.
미안. 눈가가 붉은 수진이 불퉁하게 중얼거린다. 굳은 얼굴의 양 선생이 학부형처럼 달라붙어 서서 성원 앞에 선 수진을 내려 보고 있다. 뭐가 미안한지 말해야지. 심한 말 해서 미안해.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캔 음료를 뱉는 자판기처럼 꿍얼거린다. 양 선생은 성원에게도 때린 거 사과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수진에게 구체적인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성원에게 왜 때렸냐고 캐묻지 않는다. 불쑥 튀어나오는 성원의 공격성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듯 심각한 사안으로 처리하지 않고 자기 선에서 정리하려는 생각이다. 의자에 잠자코 앉아 있던 성원도 고개를 푹 수그리며 사과한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양 선생이 무의미한 덕담을 하며 둘의 등을 두드리고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교실을 나선다. 양 선생이 나가자마자 입술을 깨물며 자리로 돌아간 수진의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든다. 창가에 앉은 성원은 몸을 움직이며 뒤꿈치로 바닥을 쿡쿡 찌르고 있다. 체육이 뭐래, 왜 너보고 사과하래, 많이 혼났냐, 쏟아지는 질문에 수진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눈물을 참는다. 성원은 들은 체 만 체하며 창밖을 보며 다리를 떤다. 소년은 에어컨 바로 밑자리에 앉은 채 기울어진 사각의 교실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증오를 듣는다. 기울어지면 아래로 몰리기 마련이나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는 없다. 소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반의 개념이 사라지므로 복도와 반은 낯선 얼굴의 아이들과 뒤섞여 시끌벅적하다. 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노망 났나, 거기서 왜 걔 편을 들고 지랄이야. 다른 반 친구를 보자마자 눈물이 쏙 들어간 수진이 열을 내며 양 선생 욕을 한다.
안녕.
장애가 대수냐고, 둑이 터지듯 고성으로 떠들기 시작하는 수진의 말을 가위질한다. 성원이 눈동자만 슬쩍 올린다. 소년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응시한다.
너 태산아파트 살지. 하교할 때 같이 가자.
수진의 목소리가 줄어든다. 성원은 고장 난 벽시계처럼 굳어 대답을 망설인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틈입한 햇빛이 소년의 몸 위에 내려앉는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등지고 소년이 싱글거린다.
소년은 성원과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밥 먹었어? 같이 먹자. 지금 하교해? 같이 가자. 이전까지 교류도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니 수진은 배알이 뒤틀려 철저히 무시하고 피한다. 의기소침하던 성원은 한층 밝아져 소년을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반 아이들 대부분은 명백하게 수진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나서서 소년과 성원을 매도하려 들지 않았다. 공공의 적이 있을수록 공동체는 돈독해지듯 저들끼리 하나의 무리를 만들어 뒷말을 만들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라 그마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성원이 이전의 인식을 되찾았을 때쯤, 사건이 일어난다.
네가 이랬지.
지찬이 성원의 멱살을 억세게 쥐고 추궁한다. 승현은 신발장 안에 끈이 풀린 채 한쪽이 다른 한쪽 위에 교차된 운동화를 꺼내며 착잡한 얼굴로 침묵한다.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몸을 비틀던 성원은 주먹을 휘두르지만 한 손으로 쳐낸 지찬이 언성을 높인다.
체육관에 없던 거 너뿐이잖아.
승현의 하얀 운동화 위 상징적인 상표가 검은 매직으로 그어져 있다. 승현은 매직을 손가락으로 문대다가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패대기친다. 딱딱한 밑창이 바닥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좁고 기다란 복도에 울린다. 승현의 얼굴은 불그스름했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아서 대답 없는 성원을 다그치던 지찬이 주먹에 힘을 풀고 슬그머니 물러난다. 봐, 또 쟤야. 문틈으로 지켜보던 수진이 반쯤 웃으며 곁에 있는 다른 반 친구와 숙덕거린다. 신발장 문을 열고 우두커니 서 있는 승현의 뒤로 몸을 기울여 참상을 본 지찬이 할 말을 삼킨 눈치로 복도를 기웃거리는 성원의 멱살을 대번에 잡아채자마자 다급하게 교무실로 달음박질한 여자아이가 역시나 플라워 원피스에 하얀 니트를 덧입은 채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치마를 휘날리는 손 선생과 걸어온다. 손 선생의 붉은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소년이 성원의 곁에 선다.
뭐 하는 거야. 증거도 없는데.
성원의 가느다란 팔목을 잡고 목소리를 낮게 깔자 승현이 묘한 얼굴을 한다. 성큼성큼 다가오던 손 선생은 애매한 거리에 멈춰 선다. 손 선생이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찬을 똑바로 응시한 채 소년이 말을 잇는다.
체육 시간 중간에 나갔다 온 애들만 해도 다섯 명은 넘는데 왜 얘한테만 그래.
지찬이 대답하지 못하자 걔들은 화장실 다녀왔잖아 멍청아, 관람하듯 구경하고 있던 수진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어조로 소리친다. 곁에 있던 키가 큰 남자아이가 참지 못하고 말간 웃음을 터뜨린다. 승리감과 눈꼴시어 무시하던 한 쌍에게 한 방 먹였다는 뿌듯함에 도취해 수진도 슬쩍 웃음을 짓는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소년이 심상히 대꾸하자 수진의 웃음이 빠르게 저문다. 저들끼리 수군대며 웃던 여자애들이 놀란 얼굴로 수진과 소년을 번갈아 본다. 침묵을 기다리던 손 선생이 적당한 때에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하자 펭귄 무리처럼 모여 있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소년도 성원의 팔을 잡은 손을 떼고 반으로 들어간다.
손 선생의 조용한 부름에 교무실로 가 성원을 챙겨달라는 은밀한 부탁을 받은 소년은 성원의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다. 조금 전의 일을 겨냥한 듯한 종례를 듣는 둥 마는 둥 한 아이들이 분주하게 휩쓸고 간 교실은 고요하다. 갈까, 묻자 성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성원의 모친은 하교 무렵 차를 몰고 찾아오곤 했는데, 엊그제 급정차한 버스에서 넘어져 허리를 삐끗해 입원하는 바람에 집이 가까운 소년에게 며칠간 동행을 부탁하게 된 것이다. 종례 바로 직전 성원이 두 칸짜리 계단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을 접질려 보건실로 직행한 탓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하교하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코가 아린 파스 냄새가 분분히 흩어지고 절룩거리는 성원에게 팔을 내어준 채 교무실 앞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가정통신문 넣었지? 뜻밖의 침묵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성원은 이어지는 질문에도 묵언한다. 어느새 학교 정문을 지나고 편의점과 학원 건물을 지나 태산 공원 무렵에 다다랐다. 해는 머리 위에 있고 구름은 흐트러지지 않고 선명하게 하늘에 박혀 있다. 이제 막 미술에 입문한 어린아이의 수채화 그림이나 컴퓨터 배경 화면처럼, 익숙한 일상의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잔잔하게 흐르는 어색하고 낯선 기류에 불쾌한 기분까지 들어 형식적으로 잇던 물음을 입 안에 봉인한다.
왜 그랬어. 승현이 신발에.
마침내 작은 날이 선 말에 성원이 걸음을 늦춘다. 앞서 걷던 소년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뒤를 돌아본다.
신발이 탐나서 그랬어? 부모님이 안 사주신대?
몸을 들썩여 가방끈을 끌어당긴 소년이 성원에게 손짓한다. 또렷하던 눈동자는 흐릿했고 발음이 새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은, 힘을 뺀 목소리는 불분명했다. 성원을 비웃고 조롱하거나 그들처럼 성원의 짓이라 확신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성향은 최상의 결과와 만족을 보장했으나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피로했다. 소년은 지켜보는 사람은 고작 성원 하나뿐인 곳에서는 학교에서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 너.
지나가는 말처럼 재잘댄 한 마디에 멈춰 서 있던 성원이 절뚝거리며 소년에게 다가온다.
나, 다 봤어.
뭘.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주춤거린 소년이 성원을 슬쩍 노려봤다.
나, 나는 다 지켜봤다구. 네가 승현이 신발에 매직 칠하는 거.
집 갈 때 매번 멀리 돌아가는 것도. 우물거리다 덧붙인다. 소년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눈 밑을 떤다. 그러나 곧, 얼마든지 잡아뗄 수 있었으나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어 평온을 찾은 얼굴로 턱을 쳐든다. 이어질 성원의 말은 나는 너 친구로 생각했는데, 혹은 위선 떨지 마, 같은 예상 범위 내에 있는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너, 너는 네가 특별한 것 같지. 너, 너도 다를 바 어, 없어. 애, 애송아.
그러나 성원은 가볍게 오차 범위를 넘었다. 댐을 넘어 범람하는 물살처럼 울컥 솟은 감정이 밀려온다. 단 한 번도 자라지 않았던 열등의식이 메마른 땅 균열 사이로 맹아를 틔워 발밑에서 꿈틀거린다. 영악함을 영특함으로 포장한 소년은 본 적 없는 언어와 온갖 눈에 띄는 색을 조악해 보일 정도로 보색끼리 짜 맞추어 세로로 겹겹이 쌓아놓은 사탕 껍질을, 페이스트리의 얇은 층을 한 겹씩 찢어 초라한 속을 발가벗기고야 말겠다는 시선을 처음으로 느낀다.
소년은 성원의 얼굴을 마주 본다. 자신을 비켜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이 시종일관 멎지 않는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재채기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부풀린 몸짓과 정지에 불안을 느끼고 연신 바닥을 비비는 신발을 내려다보고는 잠시나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는 걸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었다.
자신도 다를 바 없는 철없고 떼를 쓰는 그맘때의 아이로 비칠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초라하고 오장부터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시뻘건 분노를 느낀다. 손을 기도하는 것처럼 모으고 손톱 거스러미를 뜯던 성원이 몸을 흔들거리며 입을 달싹거린다.
그, 그리고 부모 잘못 만난 건, 너, 너야.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단하게 힘을 준 주먹이 성원의 오른뺨을 때린다. 나동그라져 공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양손으로 맞은 부위를 감싸며 더듬거리다 크게 뜬 동공을 움직여 해를 가리고 우뚝 서 있는 소년을 올려다본다.
소년은 양어깨에 하나씩 메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내던지듯 바닥에 내려놓는다. 왼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은 질감부터 다른 메이커, 오른 어깨에 메고 몇 번씩이나 흘러내리는 끈을 고쳐 매야 했던 자기 가방은 철 지난 유행의 흔적만 겨우 묻어 값싸게 내놓은 것을 큰맘 먹고 샀던 천 가방. 소년은 주위를 둘러본다. 지체된 하교 시간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아이들은 없다. 가방으로 흠씬 두들겨 패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 여전히 어벙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먹이며 아파, 아파, 말만 반복하는 성원을 내려 본다. 소년의 비상한 머리에 내기하자고 중얼거리던 성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하자. 내기.
두서없는 말에 성원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쳐든다.
저기 보이는 숲 있지,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대.
소년은 엄지만 치켜든 채 자기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무릎을 굽혀 볼품없이 주저앉아 목을 길게 빼고 멍청하게 입을 움찔거리는 성원에게 엄청난 비밀인 양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소곤거린다. 성원의 눈동자가 소년의 어깨 너머 숲에 닿아 달콤한 꿈을 꾼 것처럼 황홀에 젖는다.
제한 시간은 30분.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
성원이 머리를 위아래로 크게 흔든다. 기폭제가 ‘내기’라는 말인지 ‘보물’이라는 단어였는지는 몰라도 무적의 무기를 얻은 사람이 된 것처럼 소년은 해사하게 웃는다. 성원은 어느새 맞은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부어오른 뺨으로 몸을 벌떡 일으켜 팔다리를 휘저으며 뛰기 시작한다. 소년은 적당히 함께 뛰는 모션을 취하다 성원의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멀어지자 걸음을 늦춘다.
병신.
소년은 일부러 입술을 과하게 뒤틀며 미련 없이 등을 돌린다. 듬성듬성 자라난 풀밭에 널브러진 가방을 주우려 허리를 굽히다 옆에 있는 성원의 메이커 가방을 슬쩍 바라보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원초적인 욕망이 고개를 들어 서둘러 가방을 둘러메고 왔던 길로 뜀박질한다. 비에 젖은 나무 향이 소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년은 숲으로 들어간 성원이나 며칠 새 내린 적 없는 비를 생각하는 대신 해외 유명 브랜드 로고 자수가 옆면에 촘촘히 박음질된 성원의 신발과 망설임 끝에 두고 온 가방을 떠올리며 쓴 아쉬움을 목울대 너머로 삼킨다.